[시론] 멋진 신세계, 이상한 신세계_이동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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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이상한 신세계

이동열 교수
(합신 기독교교육학)

 

1932년, 영국 시인이자 소설가인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 통제되는 전체주의적 사회를 그린 『멋진 신세계』를 발표하였다. 이 책은 죠지 오웰의 『1984』와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쟈마틴의 『우리들』과 함께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90여 년 전에 그렸던 미래 세계의 모습이 오늘날과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 기술이 사회를 완벽히 통제하여 모든 것이 안정되고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사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잃고 재미에 취해 끝없는 자기만족과 쾌락을 좇아 멸망으로 치달아가는 세상을 그렸다. 헉슬리는 소설 속에서 최첨단 문명사회와 비록 과학 기술 문명의 이기(利器)를 누리지 못해도 삶의 의미를 찾고 본질을 추구하는 인류 중 과연 누가 진정 야만인인지 독자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는 헉슬리가 풍자한 미래 세계의 변화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는 규율 사회가 자유 사회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인식과 삶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설명한다. 사람들은 모든 관계의 굴레를 벗어나 스스로 모든 것들을 결정하고 원하는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상은 기술과 제도가 제한선을 끝도 없이 넓혀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잃고 방황한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는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며 경쟁하지만 결국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과 고통과 공허함만을 느끼는 피로 사회가 되었다고 현 시대를 진단한다.

칼 트루먼은 헉슬리의 풍자를 직설적으로 되받는다. 그는 『이상한 신세계』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한 합리와 자유가 절대적 위치에 오르자 어떻게 세상을 ‘멋진 신세계’가 아닌 ‘이상한 신세계’로 뒤바꾸고 있는지 설명한다. 트루먼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절대적인 자유가 결코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하며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각자가 추구하는 절대적인 자유가 결국 각자의 욕망을 위해 질서와 경계를 허물고 전체 사회를 무질서와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술 문명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우리 자녀들은 이 세계가 자신들의 우주가 되어 자라간다. 이들에게는 마주하는 현실이 신세계가 아닌 그저 당연한 자기 세상이다. 분별없이 쏟아지는 정보들이 손안에 있고, 마음에 일어나는 쾌락과 욕망을 제한 없이 추구할 길들이 발 앞에 놓여 있다. 앞서 언급한 소설가, 철학자, 신학자들이 지적한 문제들을 직시하지 않고 변화하는 흐름대로 사회 속에 아이들을 맡긴다면 그들의 인식과 삶은 자연스레 그 세계가 그리는 그림에 맞추어질 것이다. 아니, 주저하는 사이에 우리는 이미 우리 다음 세대를 이 이상한 신세계의 제자들로 내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헉슬리의 소설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존은 야만인 구역에 살다 문명사회에 발을 들이고는 처음 탄성을 지른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하지만 그는 문명사회의 실상을 알고는 저항하고 몸부림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우리 다음 세대가 이 세계의 모순된 현실 속에 홀로 몸부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음의 공허함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 말로 설명할 뿐 아니라 삶으로 구현해야 한다. 주어진 모든 관계가 자유를 얽매는 굴레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끈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행복은 제한 없이 마음껏 욕망을 발산할 때 오는 것이 아닌, 욕망의 사슬을 끊고 마땅히 바라고 추구해야 할 바를 향해 나아갈 때 주어진다는 것을 맛보게 해야 한다. 가정과 교회가 진정으로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때 그 안에서 자녀들이 인생의 집을 견고하게 지어갈 기초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