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9] 사건과 함께: 앙리4세의 승리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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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앙리4세의 승리

‘세 앙리의 전쟁’은 가톨릭 지도자 앙리 기즈의 피살에 이어 국왕 앙리3세가 피살되자 위그노 총수 앙리 나바르만 남음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왕위 계승법에 따라 앙리4세로 왕좌에 올랐지만, 가톨릭 세력은 위그노 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남프랑스의 몇 도시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앙리4세는 노르망디에서 영국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에 비해 막강한 가톨릭 동맹에는 앙리 기즈의 동생 마옌느가 새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마옌느는 앙리4세를 바닷속에 처넣든지 아니면 쇠사슬에 채워 파리로 끌고 오겠다고 공언하였다. 따라서 앙리4세는 결연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가톨릭 동맹과 몇 차례 사생결단의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1) 아르끄 전투. 1589년 초가을에 앙리4세와 마옌느는 아르끄에서 결전을 벌렸다. 앙리4세가 1천 기병과 4천 보병을 거느리고 방어하는 아르끄 성은 두 개의 병행하는 해자를 가지고 있었고 대포로 무장하였다. 공성하는 마옌느에게는 4천 기병과 2만 보병이 있었다. 양군의 병력이 동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9월 21일에 전투가 벌어졌다. 마옌느의 보병이 첫 번째 해자를 공격하자 방어하는 앙리4세의 군사들은 혼돈에 빠졌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두 번째 해자를 지키는 스위스 용병이 용케도 막아냈다.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아르끄의 대포들이 불을 뿜어 마옌느 군대에 중대한 타격을 가해 퇴각하게 만들었다.

(2) 이브리 전투. 1590년 3월 13일, 앙리4세는 이브리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번에도 앙리4세의 병력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3천 기병과 8천 보병으로 마옌느의 5천 기병과 1만2천 보병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군은 태양을 등지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다소 비등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앙리의 기병대가 마옌느의 기병대를 뚫었다. 왕군은 앙리4세가 개발했다고 알려진 전술을 사용하였다. 적군이 총포를 발사하기 전에 재빨리 접근해서 검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것이다. 이브리 전투는 앙리4세의 대승으로 끝났다. 가톨릭 군사가 6천명이나 전사했고 수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3) 파리 공성. 앙리4세는 이브리의 승전을 발판으로 삼아 파리를 봉쇄하였다. 남쪽으로는 센 강의 다리들을 점유하여 물자 공급을 끊었고, 북쪽으로는 몽마르뜨르 언덕에 본부를 차려 가톨릭 동맹이 강세인 북부에서 파리 방어군에게 지원병을 보낼 가능성을 끊었다. 동시에 군대를 주변 도시들에 주둔시켰다. 포병은 파리를 포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시켰다. 1590년 5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지속된 파리 공성은 시민에게 무시무시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공성하는 동안 3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1만3천 명은 굶어서 죽었다. 그러나 가톨릭 설교자들은 이단 군주 아래 평화를 맛보느니 차라리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유하면서 엄청난 종교 행진을 조직하여 열정과 단합을 과시하였다. 파리를 공성하는 동안 앙리4세는 재정이 바닥나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4) 신교 신앙 철회. 위그노를 위한 영국의 원정군과 가톨릭을 위한 스페인 원정군의 개입이 반복되는 가운데, 앙리4세는 파리를 장악하지 않고는 프랑스 왕국을 자기의 것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1593년 7월 25일, 앙리4세는 생드니 성당에서 위그노 신앙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가톨릭으로 전향하였다. 이때 그는 파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가톨릭 미사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파리는 미사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5) 파리 입성. 1594년 2월 27일, 앙리4세는 샤르뜨르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 1천5백 명의 중기병을 이끌고 파리에 입성하였다(3월 22일). 앙리는 가톨릭 동맹을 지원하는 스페인과 전쟁을 선포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가톨릭 동맹의 최종 잔여세력에게 항복을 받아낸 후에 왕권을 확립하였다. 1598년 4월, 앙리4세는 위그노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는 낭뜨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36년 동안 지속되었던 위그노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