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루이14세
“태양 왕”(Roi Soleil)은 루이14세의 별명이다. 루이는 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72년 넘게 프랑스를 통치하여(1638-1643-1715) 유럽 군주 가운데 최장기 집권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춤에 재능이 많은 루이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던 열다섯 살에 “밤의 발레”라는 무도극에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 신으로 분장하여 배우로 출연한 이후 “태양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모후의 섭정, 귀족세력의 반란, 연이은 전쟁, 재정 악화 같은 수많은 먹구름에 가려 루이의 태양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다지 찬란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위그노 탄압은 루이의 빛을 더욱 얼룩지게 만들었다.
루이14세가 위그노를 박해한 까닭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절대왕정을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위그노의 저항을 왕권 약화의 불명예스런 신호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루이는 군주가 가진 신앙이 백성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따라, “한 명의 군주,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을 프랑스에 심기를 원했다. 1681년 루이는 위그노 근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악랄한 조처를 시도하였다. 다름 아니라 “용기병”이라는 군대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기병은 한편으로 위그노의 집에 숙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며 극악한 폭력을 행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숨어 지내는 위그노를 색출하고 광야나 동굴에서 비밀리 열린 위그노 집회를 급습하는 일을 하였다.
용기병의 만행에 참다못한 위그노들이 저항을 감행하거나 프랑스 탈출을 시도하자, 루이14세는 더욱 극단적인 방도를 모색하였다. 1685년 10월 18일, 퐁뗀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할아버지 앙리4세가 위그노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였던 낭뜨 칙령을 87년 만에 폐지한 것이다. 낭뜨 철회는 11개 조항을 담고 있었는데 요점은 파괴, 추방, 폐지, 회유였다. 위그노 예배당을 모두 파괴하고(4교회만 남음) 예배를 금지한다는 것, 위그노 목사는 보름 안에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는 것, 위그노 학교를 폐지하고 위그노 자녀들은 가톨릭 신앙으로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 가톨릭으로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세금 감면 같은 혜택을 준다는 것이었다.
루이14세의 칙령이 가져다준 첫 번째 반응은 위그노들이 대거로 프랑스를 탈출한 것이다. 루이의 통치 중반기에 90만 명이나 되던 위그노 가운데 16만 명 이상이 프랑스를 떠났다. 이것은 위그노 신자의 20퍼센트 또는 프랑스 인구의 1퍼센트에 달하는 수효였다. 도피 길에 오른 위그노들은 대체로 전문직을 가진 중산층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경제는 곧바로 타격을 입으면서 재정 약화를 맞이하였다. 귀환자에게 상당한 이익을 보장한다는 재상 콜베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위그노들은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때를 맞추어 10월 29일에 독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들을 영입함으로써 독일 북부는 뜻밖의 경제 부흥을 맛보게 되었다.
한편, 루이14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가톨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가톨릭은 이들을 “새 회심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프랑스를 떠나지 못한 위그노들은 이중생활을 시작하였다. 외형으로는 가톨릭으로 전향하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위그노 신앙을 유지하면서 한밤중에 성경을 읽고 시편찬송을 부르며 신앙고백서를 익혔다. 위그노들은 도시와 마을의 교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험준한 산속의 동굴이나 노천의 황량한 광야에서 모였다. 이른 바 “광야교회”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일부 지역의 위그노들은 국가의 압박에 눌려있지만은 않았다. 특히 남 프랑스에서 격렬한 무력저항이 벌어졌다. 흰색 셔츠를 입은 농민들이 까미자르라는 이름으로 루이14세의 정예부대와 싸워 매번 짭짤한 승리를 거두었다.
나무를 송두리째 잘라도 뿌리까지 다 뽑을 수는 없는 법이다. 루이는 위그노의 외형을 파괴했지만 내부까지 파괴할 수는 없었다. 위그노의 신앙 본질은 성경책이 아니라 말씀에 있었고,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에 있었고,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루이14세는 몰랐던 것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