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8 (11:23:21)
목사의 이중직 금지 제도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교계에 이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이 문제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로서의 근로의 의무(대한민국 헌법 32조)가 있고, 직업선택의 자유(헌법 15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총회)가 목사에게 “직업을 가지지 마시오”라고 강제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 문제는 이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와 전혀 달라야 한다. 바로 “목사가 굳이 직업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도 목사들이 다른 직업을 겸직할 수 있게 공적으로 결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목사라는 직분자들이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던 이유
정상적인 성인은 모두 다 직업을 갖는다. 부득불 일할 능력이 없거나 일자리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든 직업을 갖고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런데 왜 목사들은 직업을 갖지 않을까? 그 이유는 목사라는 ‘직분’이 감당해야 할 ‘직무의 독특성’ 때문이다.
목사의 직무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이다(딤전 5:17). 또한 그리스도의 양떼를 살피는 자들이다(행 20:28). 이와 더불어 장로교 헌법(합신, 고신, 합동)에 의하면,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찬송을 지도하는 일, 성례를 거행하는 일, 교인을 심방하는 일, 교회를 치리하는 일 등을 해야 하는 직분자이다.
그런데 이 일들은 영적으로도 무거운 일이지만 물리적으로도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다. 남는 시간에 틈틈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요구되고 연속성이 요구된다. 그러다보니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는 시간들을 잘 활용하여 직분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 일에 수고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남의 일처럼 쉽게 “그 일이 뭐 그리 힘들다고”라고 말할 수 있으나, 목사의 일을 감당해 본 모든 사람들은 잘 알듯이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요구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목사의 직무 중 가장 핵심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일’만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목사는 ‘직업’이 아니다. ‘직분’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목사는 ‘무직’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봉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직분은 봉사직이요, 목사도 마찬가지며, 목사 외의 다른 항존직원인 장로와 집사도 자신의 직업을 갖고서 직분에 수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직은 다른 직분과 달리 무직 상태에서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직분이다.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는 사도들(행 6:4)에 비해서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직무이다.
이렇게 목사라는 ‘직분’이 갖고 있는 ‘직무의 독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목사는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목사에 대한 생계를 교회가 책임져 왔던 이유
직업이 없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직무의 독특성 때문에 직업을 가지지 않는 목사와 그 가족의 생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목사가 직업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감당하는 ‘직무’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결국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교회 역사는 교회가 목사와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해결해 왔다. 이것은 성경과 교회론(직분론 포함)에 근거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면, 성경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적으로 수고하는 이들에 대해 교회(회중)가 책임질 것을 명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11:8-9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라고 말하는데 이 본문들은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분자의 생계를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교회론(직분론 포함)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교회가 목사에게 생활비를 배려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목사 개인을 위해서이기 이전에 교회 전체를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목사직이 감당하는 ‘직무’는 모두 ‘교회’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일,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찬송을 지도하는 일, 성례를 거행하는 일, 교인을 심방하는 일, 교회를 치리하는 일 등 이 모든 일들은 교회를 위한 직무이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전체를 통해 일해야 하는 직무이다.
이렇게 목사의 직분이 곧 교회를 위한 직분이기에 목사의 생활을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연인이 자신의 생계를 자기가 책임지지만 목사의 생계는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다.
- 목사의 생계를 위한 이중직을 허용할 수 있는가?
목사와 그 가정의 생계를 교회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짐으로써 직접 생업(生業) 전선에 뛰어 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 타격은 목사와 그 가정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회중에 돌아온다. 왜 그럴까?
목사는 생업이 있으니 생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목사와 그 가정이 받는 타격은 크지 않다. 단, 목사가 생계에 전념하느라 목사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하기 싫어서 혹은 게을러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감당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체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생계와 목사의 직무를 동시에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결과 목사는 말씀 연구에 전념하지 못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며, 성도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부담은 결국 회중이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목사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의 의미는 “목사님! 당신이 맡은 직분은 그 특성상 삶 전체를 교회에 드려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활은 교회가 책임져 줄 터이니,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사에게 맡기신 그 직분을 담당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생활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목사의 생활에 대한 염려는 교회의 회중인 우리의 몫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원리적으로 볼 때에 목사의 ‘직무’를 보존하기 위함이요, 나아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목사의 생활비를 지급함으로써 목사로 하여금 자신의 직무에만 전념하게 하는 방식”이 오늘날까지 장로교회와 대부분의 교파 안에 정립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 ‘목사의 이중직 금지’가 목사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직과 교회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곧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목사의 생계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귀한 전통과 유산이요 목사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