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고 넘어가자! (마 4:17)
김승주 목사(안양호스피스선교회)
한국의 교수들이 택한 2022년도를 요약 상징하는 사자성어는 과이불개(過而不改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 말은 곧 발전을 위해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해를 넘기면서 신앙인들이 짚고 넘어 갈 일은 없을까?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첫째, 감사
친구 아들 결혼식에서 주례 목사님은 “태어난 것을 감사하라”하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귀한 말씀이었다. 이렇게 기쁜 결혼도 ‘존재를 주신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불평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진짜 중요한 ‘존재 자체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산다. 그 목사님의 지적은 하객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필자는 올 9월에 70년 지기 친구를 떠나보냈다. 만날 약속까지 했는데 그만 한밤 에 세상을 떠났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날은 나에게도 어느 날 불쑥 다가 올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죽음 이후에 대한 유비무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오신 핵심적 이유는 바로 그 죽음 때문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며 일생을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고 왔노라”(히2:15)고 하셨다. 약 4:14은 ‘인생은 안개’라고 했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불확실한 인생길에서 대과 없이 한해를 넘긴다는 것은 확실히 감사할 기적이다.
둘째, 회개
바울은 소위 무인가 신학교 출신이다. 애초 예수님 12제자 중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사울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불신. 사역자로써는 치명적 약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이라며 당당한 고백을 아예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노년에 에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딥전 1:15)라고 고백한다.
말씀 사역자로 살면서 그가 얼마나 헌신적 삶을 살았는지는 그의 고백과 함께한 동역자들에 의해 증명된다. 하지만 그의 자기 인식은 ‘죄인의 괴수’였다, 칼빈은 바울로부터 시작된 신학이 어거스틴을 거쳐서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신앙 교육에 매우 엄격하였다고 한다. 예배 때 조는 사람은 강단을 내려가서 회초리를 깨운 후에 설교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임종 직전 드린 기도에서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라고 했다 한다. 그토록 자타 공인 엄격한 사람도 주님 면전에서는 한낱 죄인일 뿐이다.
한해를 마감하는 마당에 우리 자신에게만은 정직해야 한다.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기도하는 그 입으로 얼마나 많은 비난을 일삼았으며, 찬송하는 그 입술로 얼마나 쓸데없는 말을 해 왔는가. 또 나 한사람 욕심으로 공동체에 준 해악은 없었는지를 돌아본다. 그동안 바쁘게 사노라 대충 넘겨 버리기도 하던 죄를 떠올리며 ‘뒤늦게나마 회개’해야 합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불신자들까지도 숙연해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305)의 작사가 존 뉴톤 목사는 ‘흑인을 상품으로 거래하던’ 잔악무도한 노예상이다. 그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자각하고 뒤늦게나마 통회하며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한 것이다. 그가 노예장사를 하던 시대는 아프리카 원주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던 시대였다.
서구가 팽창주의로 아프리카로 진출하였을 때 그들에게 흑인은 영장류의 하나일 뿐이었다. 우리가 양심에 별로 걸리는 일 없이 원숭이를 팔고 사 듯 당시 유럽 사람들은 피부색도, 생긴 모습도, 언어도, 문화도 자신들과 너무 다른 그들을 단지 동물로 보았다. 밀림을 종횡무진하여 체포하고 상품화해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영적 눈이 멀면 이렇게 무서운 일에도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 죄악인지 깨달았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죄’가 얼마나 큰가를 뒤늦게 깨닫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고백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돈을 사람보다 상위 가치에 놓고 살고 있다면 뉴톤과 동일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드러내 놓고 늦게나마 통회해야 맑은 영혼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짚고 넘어 가는 일‘. 한 해의 남은 시간 우리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