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14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지난 글에서 하늘의 만상과 바다의 모래 같이 많아질 다윗의 자손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렘 33:22)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예언(렘 33:22)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더 있다. 그것은 레위인에 관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자손과 마찬가지로 레위인 역시 하늘의 만상과 바다의 모래 같이 번성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문맥에 비추어볼 때, 이 예언도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일을 지시한다. 그리스도는 종말에 임하실 대제사장이시다(히 4:14-15).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분 안에서 레위인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된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제사장 지위의 보편화를 내다본다. 이는 예레미야에게서 발견되는 독특하고 새로운 신학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왕의 지위를 갖는다는 가르침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레위인은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하나인 레위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의 후손이 특별한 지위를 얻은 것은 출애굽 이후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이때 레위 자손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혈육이나 친분에 메이지 않고 부모, 자녀, 형제, 이웃을 심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레위 자손은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얻게 되었다(출 32:29; 신 33:8-10). 레위인이 여호와를 섬기는 직분자가 되도록 세우는 절차는 민수기 8장에 자세히 소개된다. 민수기 8:19는 레위인의 직무를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일로 규정한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스라엘 자손의 섬김을 섬기게 하며”가 된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의 섬김을 섬기는 자이다. 민수기 3:8-9에도 같은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회막에서 시무하되……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성막에서 시무할지니”가 된다. 레위인이 수행할 직무는 결국 이스라엘 자손이 수행해야 할 직무이다. 레위인은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여호와를 섬기도록 세워진 직분자이다. 원래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회막에서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레위인을 세우셔서 그들의 일을 대신하게 하셨다. 아마도 그 이유는 회막에서 섬기는 일이 여호와를 가까이서 섬기는 일인만큼 특별한 구별과 전적인 헌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민 3:9-10; 8:5-19). 레위인의 헌신에 대해 이스라엘 자손은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책임졌다(민 18:21, 24). 레위인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이런 관계는 구약 이스라엘 예배공동체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나타낸다. 레위인의 헌신과 섬김에 이스라엘 자손이 가입되어 둘이 여호와께 한가지로 드려진다. 따라서 직분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신분에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여호와를 섬긴다는 차원에서 레위인과 동등하다.
이는 레위인이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를 대신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첫 유월절에서 애굽 사람의 장자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는 무사하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출 13:2, 1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가 성막에서 여호와를 섬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 대신 레위인을 세워 섬기는 일을 하게 하셨다(민 3:11-13; 8:16-18). 말하자면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 위치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하였다. 더욱이 이스라엘 자손이 전체로 하나님의 장자라는 사실은(출 4:22-23) 레위인의 지위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서열상의 구분을 사실상 무효화한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를 대신함으로써 여호와의 장자인 이스라엘 자손 전체를 대신한다.
이러한 원리는 제사장과 이스라엘 자손의 관계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의 직분은 아론의 후손에게 돌아갔다(출 28:1; 레 8:1-13; 민 3:3). 그런데 아론의 후손 역시 레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 6:16-25). 따라서 일반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제사장 역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섬기는 직분자이다. 민수기 3:38이 이 원리를 잘 가르쳐준다: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이다. 다시 말해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해야 할 직무를 대신하는 자이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전체로서 제사장의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애굽기 19:6 또한 이것을 가르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기서 “제사장 나라”를 원문 그대로 옮기면 “제사장들의 나라”(mamleket kōhǎnîm)이다. 주석가헤밀톤에 의하면, 이 표현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제사장이라는 개념을 나타낸다. 주석가 카일은 “제사장들의 나라”에 대하여 “이 나라의 구성원과 백성은 제사장이며 그들이 제사장으로서 나라를 이루며 왕의 권세와 주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칼빈 역시 이 구절에 대해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제사장과 왕의 명예를 부여받는다”고 해석한다. 이는 물론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아론의 후손에게 국한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아론의 후손을 통해 제사장의 직무에 참여한다. 아론의 후손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제사장의 위치에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복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도 이 관점을 반영한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 61:6).
지금까지 살핀 내용은 레위인이 하늘의 만상과 바다의 모래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신분상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의 위치에 있다. 예레미야는 이 신학적 관점을 이어받아 미래에 메시아를 통해 생겨날 새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수많은 레위인의 출현을 예언한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