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아주 특별한 여행을 준비하는 삶_김현숙 권사

0
118

아주 특별한 여행을 준비하는 삶

김현숙 권사(송월교회, 나룻배 터 선교회장)

 

 식탁 위에 자그마한 책꽂이를 마련하고 늘 눈에 띄도록 필독서라 생각하는 죽음학에 대한 책 몇 권과 유품인 성경책을 꽂아 놓았다. 그 한편 지나온 발자국을 담고 세월을 담는 나만의 유일한 기억 저장고인 손바닥만 한 낡은 주황색 수첩이 자리하고 있다. 가끔 수첩을 꺼내 신접살림을 차린 년도를 시작으로 아이들 출생부터 그간의 집안 모든 대 소사가가 빠짐없이 기록 되어 있는 추억의 페이지를 넘겨본다. 달아나 버린 시간의 필름들이 펼쳐지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희로애락에 묻힌 삶을 꺼내며 잠시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상속이나 증여의 고민 없는 아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를 써 내려간 유언장에 늘 시선이 고정된다.

11년 전 초가을 결혼기념일에 남편을 하늘나라로 배웅한 후 처음 쓰기 시작한 나만의 유언장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껏 기록하고 있다. 매년마다 별반 다를 건 없지만 해마다 조금 더해진 내용을 읽으며 이제 세월이 아닌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더 보탤 수 없는 내 삶의 유예기간이 궁금해진다. 어느새 머리에 내려앉은 서릿발은 두터워지고 얼굴에는 고랑이 늘면서 황혼이란 말이 낯설지 않은 육십 후반을 지나는 요즘 부쩍 거울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잦아졌다. 늙어감이 서글퍼지지만 변해가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은 누구를 모델삼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를 또 다른 나에게 물음을 던지며 교훈하는 듯하다.

닮고 싶은 사람 모델 일 순위로는 단연코 친정어머니를 꼽아본다. 86세에 부르심을 받은 지도 어언 십사 년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순위는 변함이 없다. 내 어머니라서가 아닌 본을 보이신 믿음의 열조이기 때문이다. 홀로 남하한 실향민 남편을 만나 젊음은 온통 고생 투성이의 빈궁한 삶을 사셨지만 외조모로부터 물린 신앙의 끈을 놓지 않으셨기에 노년의 삶은 믿는 이들의 귀감이 되셨고 인생의 마침표를 멋지게 찍으시며 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셨다.

부모님은 60년대 초 실향민들이 개척한 성도가 몇 안 되는 교회에 등록한 후 평생을 한 교회만 섬기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마지막까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주일 예배의 자리를 지키셨다. 지상 교회 출입이 마지막이심을 아셨을까. 예배 후 목사님께 기도를 요청하셔서 안수를 받은 후 마음을 담은 봉투를 손에 꼭 쥐어 주셨다는 목사님께 들은 후일담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교회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어머니는 같은 교회서 자란 아들 같은 담임 목사님을 끔찍이 위하셨고 용돈을 늘 교역자들을 대접하는 데 쓰셨다. 안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성경책을 눈에서 떼지 않으셨으며 그 날도 읽으신 성경책을 머리맡에 놓으신 채 누우셨던 그 모습으로 본향을 찾으셨던 것이다.

매년 보내 드렸던 마지막 성탄 카드 속에도 주무시듯 가시라 축복했던 나의 소원이 적혀 있었지만 정작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서운함으로 슬픔도 컸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머니는 이미 저 하늘을 바라보는 부활 신앙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셨던 것이다. 생전에 맺혀 있던 여한, 그리고 가슴 밑바닥에 고인 앙금들을 털어 내면서 지난 시간들을 정리 하며 용서와 회복 그리고 구원에 감사하시며 행복해 하신 모습이 기억난다. 손녀들을 위한 자장가로 흥얼거리셨던 찬송을 장례예배 때 불러 달라고 목사님께 부탁하셨다는‘ 예수사랑 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찬양은 지금도 사모곡이 되어 입가를 맴돌고 있다. 이렇듯 바른 생활로 잘 죽는 모습을 내게 보이시며 행복한 이삿짐을 꾸리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그 모습을 열심히 흉내 내고 싶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하는 법인데, 함부로 살지 말자고 외치기 위해 몇 년 전 죽음준비학교 수강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역하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웰다잉(well-dying)교육이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 온 남편의 황망한 죽음을 겪으며 웰다잉 교육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국립 암센터 호스피스 고위과정을 마치고 호스피스 병동 환우들의 영적 케어를 담당하면서 늘 죽음의 공포와 영적 전쟁을 하는 환우들을 보았기에 죽음 준비의 중요성을 깨닫고 별세 신앙을 앙망하게 되었다.

생의 끝자락에서는 어느 누구나 애틋하고 간절하기에 대부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숭고한 모습의 성도들도 종종 보게 된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정결한 신앙의 모습을 놓지 않고 모자이크하면서 나의 마지막 생의 완성판을 만들어 두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도 천국의 의미를 심어 주고 떠난 그들을 모델 삼아 부활을 꿈꾸며 죽음을 연습한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죽음을 꿈꾸지만 죽음을 위한 아무런 준비 없이 아름다운 죽음은 불가능하다. 오십 중반을 살짝 넘긴 나이에 느닷없이 부름을 받은 남편 역시 마지막 순간을 예감한 듯 정갈한 믿음의 흔적과 귀한 언어들을 남겼다. 뒤돌아보니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났기에 누린 복이요 큰 은혜였다. 새 가족 등록을 마친 후 짧지도 길지도 않은 만 육년 동안 교회를 끔찍이 사랑하며 언제나 바름을 보이시는 담임목사님이 자신의 모델이라며 좋은 교회의 신자 됨을 자랑스러워했다.

유품으로 남긴 수첩에 적어놓은 설교 말씀대로 살아가려 애쓴 흔적을 교회 곳곳에서 발견하곤 한다. 그동안 기복 신앙에 빠져 지상의 것들에 연연했던 탐욕의 눈이 천상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컸다. 헌신을 다하려 노력했던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며 남겨진 자녀들도 교회를 사랑하며 멋진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남겼으면 좋겠다. 이렇듯 남편을 떠나보냈으면서도 슬픈 이별이라 생각지 않는 이유다.
그리움을 묻어 두고 사역에 열중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금은 호스피스 사별가족을 지원하는 선교회를 운영한다. 계기를 만들어 준 남편의 영향도 있지만 아내를 먼저 보낸 가장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보를 듣고 남은 가족을 보살피는 사역의 중요함이 절실했다. 기도하던 중 명칭을 정하고 4년 전 선교회를 설립하게 하신 주님은 필요한 인적 자원을 모아주셨다. 외롭고 어려운 길이지만 단 한 순간도 후회함 없이 20여 년 동안 한 결 같이 환우들을 돌보는 사역을 이어 올 수 있음은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우리 교단의 바른 사상을 강조하는 합신 정신이 크게 작용했다. 죽음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지상을 거처 삼고 살았던 나를 호스피스 사역을 통해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전적인 은혜가 감사하기에 나를 들어 쓰신 주님의 계획에 맞게 웰빙의 삶을 살면서 웰다잉을 준비하는 종이 되기를 소원해 본다.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잘 받아야 하지만 자식이든 누구든 언젠가 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를 평가할 날이 오리라. 이제 아등바등한 삶을 내려놓게 되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며 매 순간순간이 마지막이라는 태도로 살기 위한 나를 성찰하기에 바빠졌다. 요즘은 남편이 읽었던 성경책을 펼치고 성경 필사에 빠져있다. 바깥사돈 장로님의 지휘로 두 가족이 쪽수로 나누어 쓰며 합본을 만드는 작업이다. 가보가 되어 나의 흔적이 남을 것이다. 지갑 안쪽에는 십여 년 전 남보다 빨리 작성해 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온라인으로 등록하며 받아 둔 증명서와 장기 기증 서약서 두 장이 있다. 내 결정권으로 작성해 둔 귀한 카드가 쓰일지는 모르지만 기도하며 다부진 마음으로 실천한 내 자신을 응원한다.

나그네 인생길 7부 능선의 고지를 바라보며 때로 갈렙을 떠 올린다. 85세의 나이로 청년을 넘나드는 육신을 자신했던 갈렙은 항상 내 노년의 표상이다.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 내가 감사하게도 작년 6월 명예권사로 추대되어 축하를 받았다. 몇 년 안 되어 은퇴를 하겠지만 인정받은 직분자로 살며 갈렙을 닮은 노년을 보내고 싶다. 모세 또한 사역을 마칠 때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기쁨에 가득 찬 찬양을 드리지 않았던가. 광야생활을 통해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노래했던 것이리라.

멋진 삶을 완성하기 위하여 성경 속 믿음의 열조들의 마지막 삶을 대입 시키며 내 삶의 무늬도 오롯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상에 남겨두고 떠난 가족의 그리움은 늘 그림자가 되어 나를 따르지만 언젠가는 해후할 날을 고대하는 기다림은 설렌다. 설렘을 가득안고 영원히 잇대어 있는 천국을 바라보며 오늘도 잘 죽기 위해 겸손의 옷을 걸치며 아주 특별한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리는 연습을 한다. 점점 그 손길은 익숙해 질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병원 예배와 웰다잉 강의는 멈춰졌어도 호스피스 사별 가족과 어려운 환우들의 지원은 계속하고 있다. 복음의 전달자로 끝까지 드려지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떠나갈 채비를 하며 남은 인생을 부끄럼 없이 실시간의 삶을 살아내면서 누군가 내 삶을 본뜨도록 이 땅에 남겨야 할 것들을 위해 부지런을 떨기로 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고 평온의 두 손을 모으는 환우 곁을 지키며 사명을 다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