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향기 13] 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9 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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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9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만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의 신분을 갖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설명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자 부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 본연의 목적과 사명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받드는 가운데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세상,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자기 본연의 목적과 사명에 충실하였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이 되기보다 불순종하는 탕아가 되고 말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먹기에 좋고, 보기에 끌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 3:6) 열매를 취하여 먹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육체의 욕구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요구하는 순종의 삶을 거부하였다. 하나님 편에서 그것은 아들을 잃는 일이자 부왕이 돌변하여 반역자가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의 역사는 아버지를 떠난 탕아의 역사이며 왕을 배신한 반역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창세기 6:1-4에 기록되어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이 칭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한 일은 그들의 신분과 심히 모순된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가 했던 일을 그대로 답습한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는 일에 몰두한다. “좋은”(ṭôb)과 “취하다”(lāqaḥ)가 두 본문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 그들은 단지 시각의 자극에 반응하는 육체의 욕구에 충실할 뿐이다. 하나님은 이들에 대하여 “육체”(bāsār)라고 평가하신다(창 6:3). “육체”에 굴복한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인간 본연의 사명을 수행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그 존재 목적에서 이탈하였기에 존재할 이유도 상실하였다. 홍수 심판은 목적을 잃은 세상에 따를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아들을 다시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과연 하나님은 새로운 아들을 일으키셨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곧 하나님의 새로운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모세를 바로 왕에게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b). 출애굽의 하나님은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시다. 동일한 내용이 호세아 선지자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호 11:1). 모세가 광야 40년의 세월을 회고하면서 한 설교는 더욱 감동적이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이 말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해준다. 신명기 32:18은 이 사실을 더욱 충격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낳은”(yālad) 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낳기 위해 “산고를 겪는 분”(meḥōlēl)으로 소개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아들로 지으셨듯이 이스라엘을 아들로 낳으셨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신분과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무엘서는 다윗 왕가의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힌다. 다윗언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에서 표준적인 언약 문구에 상응하는 표현이 나타난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a). 이는 다윗 왕가의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포로기의 인물로 추정되는 한 시인은 다윗언약을 상기시키는 언어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가(다윗)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 89:26-29).

이 노래는 다시금 시편 2:7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구절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는 맥락에서 인용된다(행 13:33 참조). 히브리서도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히 1:5; 5:5 참조).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시편 2:7의 예언에 따라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다른 한편, 구약의 맥락에서 시편 2:7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윗 왕가의 왕들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다윗의 등극은 곧 아들의 출생이다. 이스라엘을 아들로 낳으신 하나님은 다윗을 아들로 낳으신다(신 32:18 참조). 여기서 다윗의 위치와 역할을 엿볼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왕직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부왕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태초에 아담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다윗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앞에서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자 장자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았을 때,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장자로 불리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윗은 집합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왕을 백성의 형제로 규정하는 신명기의 율법은 정확하게 이 관점을 대변한다(신 17:20 참조). 구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왕과 백성 사이에 신분의 차별은 허물어진다. 왕이 하나님의 아들인 만큼 백성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왕은 백성을 대표하는 자일 뿐이다. 백성의 대표자로서 왕은 앞장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왕직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윗 왕권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윗 왕가에서 등장할 통치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사 9:6-7; 11:1-5; 렘 23:5; 33:15 참조). 선지자들은 이 미래의 통치자를 다윗과 동일시하기도 한다(겔 34:23-24; 37:24-25; 호 3:5 참조). 이 왕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것이며(사 9:7),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온전히 지킬 것이다(겔 37:24). 이것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다윗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막 1:14-15). 놀랍게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이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담, 이스라엘, 다윗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아들 칭호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소망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