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소중히 여겨 참된 교회를 이루어야
예수님의 ‘수죽부(수난, 죽음, 부활)’의 성취는 오래 전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의 실례로서 명확하듯이,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원리가, 이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이 되어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써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계시이자 천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물이 되신 사실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방식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었던 구원 방식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구원방식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이다. 이 원리를 바울도 설명했다.(롬 4:23-25) 여하튼 구원이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원리를 계시하고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는 제자들의 깨달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수죽부’를 성취하신 후로는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신 데서 명확하다.
이 진리의 엄중함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최초로 고백했던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즉각 뒤이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선포하셨던 데서 이미 잘 드러났다. 지금은 예수님의 수죽부가 완성된 이후 시대이기에,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우리 안에 가져 오시는 사실까지도 포함되는데, 그에 따라 성령은 택한 백성들 속에 항구적으로 내주하시는 식으로 ‘구원을 보증하시는 영’ 이 되신다.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구원방식이 이렇기에, 성도로서는 자신의 생명활동의 원천과 내용과 목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재현, 곧 교회의 진정한 교회화에 집중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부활하여 천상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속에 자신을 자리매김하시는 임재방식으로서 규정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우리를 연합시키는 데 따라 우리로서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자신이 교회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는 데 대해, 매우 각별한 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수 없다.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한, 그런 지체들로서는 예외 없이 서로 간에 신실함으로써 이루어 나가야 할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 한 사람쯤이야 아무런들 어떻겠나!” 하는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각성하고 주의해야만 한다. 교회는 다수의 지체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를 구현해 내는 데서 최상의 가치가 성립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즈음 전염병의 확산으로 우리의 예배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우리는 비상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이 아무래도 평소와는 달리 어색하고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평소 평온하게 가질 수 있었던 예배 시간들이 무척이나 그립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평안함 속의 예배가 사실상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는가를 말이다.
이런 깨달음마저 얻지 못한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속히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만을 간절히 소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간구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애절하고 진실한 만큼, 지금 상황의 호불호가 어떻든 간에,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로서도 최상의 예배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에게 구원이 베풀어져 있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수죽부 사역이 베풀어 주는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상호간의 의무에 신실함으로써,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의 확신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