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4~17)_오태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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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4~17)

오태중 목사(예수소망교회)

 

삶의 목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섬김을 본받는 신앙과 삶

수많은 만남, 스승, 선배가 있지만 대부분 일회성 만남일 뿐, 아버지와 같은 만남은 많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참 복이 많습니다. 왜냐면 사도 바울 같은 충성된 주님의 종, 영적인 아버지 같은 목회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바울은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합니다. 해산의 수고로, 복음으로 어렵게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성도들을 만난 사도 바울은 영적 아버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십자가의 복음으로 난산으로 성도를 낳았기에 영적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중심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람은 일생 누군가를 본받게 돼 있습니다. ‘본받는다’라는 말은 ‘닮아 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일생 누군가를 존경하고 닮아 갑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배우고 닮아 가느냐가 일생을 좌우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위대한 신앙적, 교육적 선언입니다. 참 어려운 권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따르라.’ ‘닮으라.’고 자신 있게 권면합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라.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께 죽도록 충성한 것 같이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음같이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바울과 같은 담대한 권면과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큼 믿으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나를 닮으세요. 내가 주님을 잘 섬기는 것 같이 나를 따르세요.’ 이럴 수 있어야 진정한 교사요, 스승입니다. 문제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할 때 누가 나를 닮을까 봐 걱정하는 경우입니다. “제발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든가 아내가 자녀에게 “제발 네 아버지는 닮지 마라.”한다면 얼마나 불행 합니까? 반대로 “네 아버지를 닮아라.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다.” 이래야 복된 가정입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선한 의미의 “자기만족”이 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 나를 닮아라. 나만큼만 해도 괜찮다. 왜냐면 나는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 만족하는 이 마음 자체를 본받으라 합니다. 내가 ‘나’라는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본받으라 합니까?

첫째, 삶의 목적을 본받으라 합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도 배신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삶의 목적입니다. 목적이 불분명하므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오직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살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든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존재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목회자는 더욱더 목적이 분명해야 본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목적을 두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 이 순간도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달려간다. 너희는 내 삶의 목적을 본받으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는다 합니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는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맞고, 그리스도처럼 부활하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를 각오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유한한 생을 살다 마지막을 맞이할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에 이를 것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셋째, 섬김을 본받으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 일생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행 20:18~19)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앞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고난을 참으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고통 가운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변함없이 섬겼습니다. 주님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고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섬긴 것처럼 나를 본 받아 섬기며 살아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아주 유명한 권면을 합니다. 운명을 가를 만큼 위급한 재판 중에 당당히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행 26:29).

얼마나 당당합니까? 이것이 바울의 열정입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나를 본받으라. 나는 행복하다. 만족하다. 평안하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고민은 본받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으면 ‘건물주’요 한답니다. ‘조물주’보다 더 높은 자가 ‘건물주’랍니다. 그만큼 주변에 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본을 끼치지 못한 현실입니다.

주님은 어떤 본을 보였습니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주님의 낮아지심과 겸손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의 목적을 본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로 삽니다. 그리스도의 그 엄청난 평안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과 평안이 우리 것이 됨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