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를 부정하는 현대신학의 오류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전가 교리 부정하는 신학은 신비체험과 유사 성령체험으로 가고 있어”
어느 신학대학원 석사(Th.M) 과정에서 독일에서 공부한 모 교수가 ‘어거스틴의 원죄 교리를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의 신화로 여기고 원죄는 없다’는 식의 강의를 했다고 한다.
국내에 점점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서구 신학의 영향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서구현대 신학의 보편적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원죄 교리의 부정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매우 불편하게 여겨서 한 때 존 스토트도 동조한 바 있는 영혼 소멸설이 등장하기도 했고 지금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최근 미국의 목회자 랍 벨이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지옥은 없다’는 주장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모두가 죄와 그에 대한 진노, 그리고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대속 개념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한국교회에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고 머지않아 밀어닥칠 신학적 위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신학의 맥락은 기독교회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 재침례파들이 지난 1500년간의 교회 역사를 뒤엎고 사도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을 펼쳤던 것과 다를 바 없다.
교회는 역사 위에 서 있다. 칼뱅이 제도로서의 교회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칼뱅의 신학은 어거스틴 위에 서 있다. 칼뱅의 이런 시도는 그가 교회를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으로 보지 않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보존하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삼위일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공교회가 진리로 세운 삼위일체 교리를 허물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처럼 원죄 교리나 진노 개념,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대속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이고 부인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왜 서구 신학은 원죄 교리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일까? 사실 원죄 교리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후기에 펠라기우스와 논쟁 중에 원죄 교리를 확립하는데 그 근거가 되는 본문이 로마서 5장 12절이다.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모든 인간은 ‘씨앗 형태’(ratione seminali)로 아담 안에 있었고 부모의 육체적 관계로 출생할 때 죄를 물려받고 출생하는 것으로 원죄 교리를 설명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주해에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원죄 교리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원죄 교리를 옹호하는 후대의 신학자들도 각 사람이 ‘간접적’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직접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그대로 받지는 않는다.
벌콥의 조직신학을 보면, 행위언약에 근거해서 죄책(죄의 형벌)은 ‘직접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전가’된 것으로 보고 그 전가된 사망을 근거로 오염(부패한 형질)이 부모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으로 원죄 교리를 설명했다.
성경에는 원죄 교리를 옹호하는 많은 본문이 있다. 구약의 역사가 보여준 이스라엘의 타락과 실패는 이 교리를 확증한다. 원죄 교리는 단순히 이 한 구절에서 도출된 신학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인간의 부패에 관해 강하게 증거한다.
원죄가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 구원 얻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굳이 그리스도께서 율법 외의 다른 의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필연성이 없다. 이처럼 원죄 교리의 부정은 자연히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가장 기본적 전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런데 이런 진노 개념은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당연히 대속 개념도 상당히 수정을 가하게 되는데 전통적인 대속(propitiation)라는 전통적 속죄 개념을 싫어한다. 대신에 속죄(expiation)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전통적으로 칼뱅주의는 형벌적 대속론을 취해왔는데 이에 대해서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매우 강하게 있다. 형벌적 대속론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고 그 진노를 멈추셨다는 개념을 담는다.
대속(propitiation)을 표현한 이 단어는 출애굽기 25장 17절의 “속죄소”를 의미하며, 정확히 번역한다면 “진노가 가라앉는 곳, 또는 화해의 장소”(propitiatory, or place of propitiation)를 의미한다(propitiation는 신약에서 2회 나온다. 로마서 3:25, 히브리서 9:5).
이 대속 개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그 진노가 비롯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죽음을 아담과 달리 완전히 순종한 인류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가 대신 행하심으로써 그 공의가 만족되었다는 개념을 담는다.
단순히 죽었기 때문에 만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담과는 달리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진노가 누그러뜨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지우려는 시도가 있다(Holmes, Steve. 2005. “Can punishment being peace?: Penal substitution revisited.”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8(1). 104-123.: 106, 113).
현대 서구 신학의 이런 경향은 마치 몬타누스가 구약의 진노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바울서신만을 정경이라고 주장했던 맥락과도 통해 있다. 게다가 몬타누스주의는 황홀경에 취해 예언하는 신비주의 경향의 원조이기도 하다.
새관점(NPP) 등, 현대 서구 신학은 이런 몬타누스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원죄를 부정하고 진노를 싫어해서 J.I. 패커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원죄 교리도, 하나님의 진노도, 그에 대한 대속도, 지옥이라는 심판도 다 부정해버리면 기독교에 무엇이 남는가? 그러다보니 결국 남는 것이라곤 몬타누스적 신비체험과 유사 성령 체험 외에는 갈 곳이 없다. 새관점이나 여러 현대 신학들도 이런 경향을 보인다. 새관점이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데도 이런 맥락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트렌트에 가까운데 오순절 운동의 확산과 이런 유의 신학 태동에는 거의 원죄 교리를 암묵적으로 부정하고 대속과 진노의 개념을 수정하며 도래할 심판을 수정하려는 신학의 터전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