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 조진모 교수(역사신학) >
|이 글은 총회신학위원회가 주관한 WCC에 대한 합신의 신학적 입장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WCC의 역사와 한국교회의 분열을 통해 본 WCC 비판” 중에서 ‘WCC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다룬 부분으로 WCC 부산 총회 개최와 관련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발췌하였다. 편집자 주|
1. 보수, 진보, 그리고 중도
WCC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교회의 분열’의 맥락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교회의 연합’을 추구하며 시작된 WCC는 처음부터 내적 갈등을 겪어왔다. 그 축을 이루고 있는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선교와전도 위원회’(CWME)는 갈등과 연합의 행보를 거듭하여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이 지닌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미 그 전부터 신학적 보수, 진보, 그리고 중도로 갈라져있던 한국장로교회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를 주었다. 보수적 신학을 지키려 했던 합동측 에큐메니칼 운동 자체를 거부하였다.
1935년에 제일 먼저 분리된 기장측은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윤리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59년에 합동측과 갈라선 통합측은 중도적 신학을 추구하였으며, 에큐메니칼 교회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히 지적해야 할 점은, WCC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과 분열은 세계교회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WCC의 출현은 세계교회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하며 대항하는 초교파 단체가 형성된 것이다.
1941년에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조직되었고, 같은 해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두 단체를 주도하였던 Carl McIntyre 목사의 독특한 성격과 지나친 근본주의적 경향으로 인하여 보수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1942년에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면서 교회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겠다는 취지를 가진 자들이 규합되어 ‘복음주의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결성되었다. 그들은 WCC와 ICCC의 중간 노선을 지향하는 교회일치를 주도하였다. 그 결과 세계교회는 WCC와 이에 대항하는 ICCC와 NAE의 형태로 크게 나뉘어졌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회들 가운데 캐나다연합선교회, 북장로선교회, 그리고 호주선교회가 모두 WCC를 지지하였고, 오직 보수적이었던 남장로교선교회만 유일하게 이에 대해 반대하였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들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던 시기에 생긴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WCC로 인한 세계교회의 분열이 한국교회의 분열에 끼친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NAE으로부터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947년 보수적인 조선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앙동지회’는 초기 한국교회의 WCC운동에 반대를 주도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1952년에 한국 NAE가 조직되었다. 한국교회에서도 WCC와 반 WCC 대결구도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ICCC의 투쟁적 성향에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같은 해에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Fellowship)에 가입한 후 미국 NAE와 지속적인 교류를 가졌다.
초교파 단체였던 한국의 NAE는 합동측의 보수적 신학을 추구하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중심되었다. 그 예로, 박형룡 박사가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정규오, 손치호 조동진, 신복윤 등이 협회의 임원을 맡았다. 한국 NAE는 교파를 초월하여 성경적인 교회의 연합 운동과 WCC의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데 앞장섰다. 보수 신학자였던 박윤선 교수는 1950년 4월에 WCC의 신학적 성향과 향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끼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반대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들(WCC)은 처음부터 각 교파의 교리를 그들의 그릇된 주장대로 통일하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적으로 먼저 교회 실권(교회 정치력, 다대한 사람 수 내지 국가의 권력) 잡기를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런 실권을 잡은 후에 그것으로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 합니다. 사태가 결국 그렇게 되는 때에는 세계교회의 각 교파는 성경과 교리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런 세계 교회 운동의 실권에게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한국기독교연합회’(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를 통하여 WCC와 구체적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1948년 WCC 창립총회에 참관인으로 파견된 김관식 목사의 요청에 의하여 WCC의 회원으로 된 것이다.
기장측은 1953년에 분리한 후 앞으로 WCC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활동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제2차 WCC총회에 가입을 신청하여 1961년 제3차 총회부터 정식회원이 되었다. 그 후로 기장은 KNCC을 주도하며 한국교회의 ‘삶과 봉사’ 운동을 중심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나갔다.
통합측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는 1956년 KNCC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폭넓은 에큐메니칼 정신과 중도적인 신학적 입장을 취했던 그는 ‘삶과 봉사’의 진보적인 면은 거부하면서도, ‘신앙과 직제’가 추구하던 에큐메니칼 교회론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1950년 분열 전 한국장로교회는 WCC의 두 축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기장측과 합동측은 WCC에 대하여 매우 분명한 태도를 보였던 것에 비하여, 통합측이 애매한 입장을 고수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WCC가 1959년에 합동과 통합의 분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합동측은 통합측의 중도적 태도에 혼란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WCC를 반대하는 듯하다가, 다른 때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통합측은 계속하여 WCC와 연관을 맺으려 하였다.
1953년 기장이 갈라진 후부터 WCC를 중심으로 보수와 중도의 대결이 표면에 다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의 정체성을 재점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1954년 제2차 WCC총회에 대표를 파송하였다.
이들 중에 명신홍은 WCC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로, 김현정은 긍정적인 단체로 상반되게 보고하였다. 보고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두 사람의 신학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56년 제41회 총회는 8인으로 구성된 WCC의 에큐메니칼운동 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다음 해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등의 반대파와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등의 찬성파로 갈라진 연구위원들의 대립으로 인하여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WCC 반대측은 1958년 제43회 총회에 ‘에큐메니칼반대, WCC탈퇴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WCC 찬성측에서는 ‘에큐메니칼운동 반대건의서에 대한 반박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WCC가 지향하는 것은 세계 교회의 공동 활동을 실천하는 운동이지 결코 로마 카톨릭으로 환원하는 운동, 신앙사상의 혼합체운동, 이단운동이 아니라는 변증이다. 다른 하나는 WCC에 반대하는 자들을 형식과 위선에 사로잡힌 분파주의자들이며 근본주의자들로 비난하는 것이다.
통합측은 ‘삶과 봉사’의 기본정신에는 동의하였으나, 기장측과 함께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여 사회에 대하여 진보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동조하기는 꺼려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WCC 내의 두 개의 축 사이에 있었던 긴장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WCC를 두둔하려 했다는 점이다. 결국 195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는 WCC를 반대하는 그룹이었던 합동측과 찬성하는 그룹이었던 통합측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역사적인 사건의 원인에 대한 합동측과 통합측의 해석이 다르다. 합동측에서는 WCC의 신학이 절대적인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통합측에서는 보수측이 WCC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장로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의 신학교 부지와 관련된 삼천만환사건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통합측은 1959년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이 WCC이었다는 자명한 역사의 증거를 애써 부정하려할까? WCC의 ‘신앙과 직제’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교회론은 올바른 교리로서 결코 ‘교회의 분열’이 아닌 ‘교회의 연합과 화목’을 도모하는 단체라는 사실을 증거하려는 의도 때문으로 생각된다.
통합측은 1959년 장로교회가 분열된 이후 지금까지도 WCC에 계속 몸담아 왔다. 무엇을 말하는가? WCC의 ‘가시적 교회’의 연합를 강조하는 통합측은 자신들은 끝까지 한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급진적인 기장측과 분리주의적인 합동측이 갈라져 나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1959년 분리에 있어서 WCC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명한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또한 그들이 WCC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WCC의 교리가 장로교회의 신조와 교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 일치한다고 보는 그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고수하는 것이다.
3. 1960년대 이후의 장로교회의 정체성
WCC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창기 WCC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진보, 보수, 중도로 나뉜 한국장로교회는 이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하였을까?
1950년대 분열된 한국장로교회는 교파별로 각기 다른 관심을 보였다. 분열 전에 자신들을 견제하던 세력이 사라진 후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오랜 역사적 전통을 공유하였던 장로교회 교단은 분명한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로, 기장측은 WCC의 신학과 사역의 변화에 의하여 큰 힘을 얻었다. 그들은 분열 이후 KNCC를 중심으로 한층 더 활발하게 ‘삶과 봉사’운동을 전개하며 진보적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1971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로 명칭을 변경하고 교회교단만 회원자격을 인정하도록 정관을 바꾸면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각성을 새롭게 하였다. 그들은 WCC의 에큐메니칼 윤리와 선교 운동에서 계속적으로 주장했던 사회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찾아온 사회적 문제는 물론 인권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에 대한 교회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대정부 투쟁에 나섰다. 교회는 독재정권을 향해 민중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감금되었으나, 정치적 압력과 회유에도 마다하지 않고 강력한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해방신학을 받아들인 후에 한국의 상황에서 ‘민중신학’은 발전시켰다.
세계의 진보적 신학자들은 한국의 상황과 ‘삶과 봉사’ 사역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였다. 이와 같이 기장측은 WCC의 시대적 변화를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달하는 창구가 되었다.
두 번째로, 합동측은 분열이후 WCC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WCC는 다양한 신학적 문제들이 만연한 단체라는 꼬리표를 붙인 후로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별 관심도 없었고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에큐메니칼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를 중심으로 급변하자 복음주의자들이 집결하여 대항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으로도 선교적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급진적 선교방법, 특별히 ‘인간해방’을 에큐메니칼 선교의 과제로 삼은 1972년 방콕 CWME 제8차 선교대회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번에도 세계 교회의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 이전의 NAE의 지도자들이 중심되어 1974년에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 ‘세계복음화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를 개최하였다. 이 모임에서 작성된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은 에큐메니칼 선교가 강조하는 사회적인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참여와 전도와 상반된 것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한 참회를 선언하였다. 로잔 운동를 계기로 하여 복음주의자들도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다짐하였다.
로잔운동은 로잔신학과 세계선교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하여 1989년 7월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2회 국제대회를 개최하였다.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대결구도는 ‘에큐메니칼선교대 로잔선교’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걷던 그들의 행보를 더욱 분명하게 갈라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복음주의는 1959년 분열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보수신학을 대변하고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 1970-80년대의 복음주의는 처음 NAE가 창설되었을 때와 많이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수적인 교리와 사회적 영향력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교리의 중요성을 퇴색시키며 실천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영향력이 있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하여 세속기관이나 자유주의 신학을 지닌 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그들에게서 보수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타임지가 1976년을 ‘복음주의의 해’로 정한 것은, 복음주의의 신학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놀랍게 커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복음주의는 곧 보수신학이란 공식이 가능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복음주의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성향도 전통적 보수로부터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큐메니칼 선교를 비평하는 자들의 신학적 관점이 매우 넓어졌다는 것이다. 철저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할 수 있다. 1950년대와 같이 에큐메니칼 선교를 비평하는 자는 곧 보수신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어찌 보면 보수신학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온건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은 현대복음주의다.
세 번째로, 통합측은 분열 이후에도 줄곧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러나 기장이 중심이 된 ‘삶과 봉사’운동에 비하여 ‘신앙과 직제’운동의 활동은 매우 미약하였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가 60년대부터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 WCC의 에큐메니칼 교회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교인들의 정서는 WCC와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와 일치라는 개념은 결코 쉽게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통합측은 분열 후 줄곧 WCC와 관계를 맺어오다가 혁신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기장이 중심되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활발하게 WCC의 에큐메니칼 활동을 시행하던 1989년 12월에, 보수계 교회들의 연합체로 알려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발기되었는데, 통합측이 이 단체 설립의 원동력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1959년 분열시 통합측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WCC를 끝까지 옹호하던 한경직 목사가 30년이 지난 해에 한기총의 준비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이다. 첫 대표회장을 맡았던 박맹술 목사도 제74회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한 통합측의 인물이었다.
통합측이 새로운 보수단체를 주도하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WCC의 에큐메니칼 윤리에 앞장섰던 기장과의 차별화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에서의 에큐메니칼 교회론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통합은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대결구도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면서 복음주의의 옷을 새롭게 입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통합은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 이미지를 지니고 넓은 활동반경을 구축하게 되었다. 좌로는 함께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KNCC가 있다. 우로는 한기총에서 활동하는 보수적 성향이 있는 교회들이 있다.
통합은 분열이후 지금까지 한 교단으로 남아있었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교회론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또한 그들이 현재 한국교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초월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단순히 그들이 중도적 입장에서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기보다 역시 그들의 교단의 특성과 신학적 차이를 넘는 하나의 교회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교회론을 실천한 결과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WCC의 ‘삶과 봉사’운동과 CWME의 ‘하나님의 선교’를 쉽게 수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한국교회에서 WCC의 ‘신앙과 직제’운동은 부분적이나마 매우 성공적이었다.
결론
우리는 WCC가 1948년에 첫 총회를 가지고 ‘세계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커다란 비전을 가지고 출발하였지만, 결국 ‘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는 단체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등장과 함께 세계교회의 흐름은 에큐메니칼 정신과 신학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분리되는 모순된 현상이 생긴 것이다.
또한 WCC 산하 단체들 사이의 내적 갈등이 세계교회를 더욱 커다란 혼동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장로교회도 1950년대에 WCC를 중심으로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였는데 2013년 제10회 부산총회 개최를 앞에 두고 동일한 문제가 다른 양상으로 재현되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는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앞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몇 가지 구체적인 제안을 하려한다.
첫째,WCC는 결코 하나의 취지와 목표를 공유하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색깔에 비유하자면, 마치 다양성 속의 일치를 나타내는 무지개와도 같다. 그들은 결코 한 색깔을 띠고 있지 않다. 다양한 색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화무쌍하게 자신들의 색을 바꾸어왔다.
WCC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도 그들을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들도 제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WCC는 파란색이다!” “아니다.
WCC는 노란색이다!”라는 논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자. “WCC는 무지개색이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WCC는 6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서구교회가 중심이 되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제3국의 교회들의 영향력이 커져왔다. WCC는 피선교국 교회들이 세계교회 규모에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이다. 다시 말해, 현재 서구교회는 점점 WCC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국에서 모임을 갖는 의미에 대하여 필자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단지 분명한 것은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나 총회중단의 노력과 상관없이 WCC는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WCC 총회를 아주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WCC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호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2013년 총회가 끝난 후에 현재 유치를 찬성하는 개인과 단체들 중에 향후 한국교회와 WCC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자성의 소리가 무척 높을 듯하다.
셋째, 복음주의자들은 로잔대회에서 자신들이 이 분야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정하려 하였다. 그 후로 보수성을 지닌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론과 실제, 신학과 목회, 그리고 토론과 실천의 양면이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의 선포와 사랑의 섬김으로 힘을 더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굶주린 자, 고독한 자, 억울함을 당한 자들을 찾아가 품어야 한다.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우리 보수신학의 파워가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