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상호성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차식 목사, 덕일교회 >
시작하는 말
교회 안에서 설교는 언약의 약속과 그 분의 자비만을 강조해야 하는가. 약속
과 더불어 계명에 대한 요구를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인가. 부모
들이 주의 교양과 훈육으로 자녀들을 양육할 때 언약은 깨어질 수 없다고 가
르쳐야 하는가. 이와 같이 가르치면 알미니안인가.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언약은 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깨어진다면 그것
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유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1. 언약 구성 요소는 알미니안인가?
언약은 약속과 요구로 되어있다. 칼빈은 언약의 상호성(창 12:3; 출 24:5;
시 78:37; 105:11; 122:4; 행 24:5; 렘 22:24; 호 2:16,19,20; 합 1:12; 슥
9:11; 말 2:5,10)과 믿음과 순종의 조건성(출 19:5; 신 29:10; 레 2:13; 사
56:4), 회개와 같은 언약의
조건성(시 81:5; 렘 14:22; 말 2:5,7; 수 7:10)
을 언급하고 있다.
언약은 기원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다. 이는 언약의 모든 대상이
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데 결
코 실패하지 않은 것이다. 언약의 유지는 쌍방적이고 조건적이다. 언약 백성
이 그분의 말씀을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지 아니하면 언약의 복은 상실된
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스마엘과 에서는 양자에서 제외되었는데 충성스럽게 하
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기 때문이
다”고 한다. 칼빈은 언약의 ‘조건’이라는 용어를 수 없이 자주 사용하였
다. 이 약속과 요구는 성경의 일관된 구성요구이다.
산상수훈을 통한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새 언약백성들에게 언약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세운 것과 같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어떻게 언약
을 깨뜨렸는가를 보여준다.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위한 거울로 과거 이스라엘을
제시한다. 여기서 사도
는 새 언약 백성들에게 언약적인 순종(의무)의 길로 나아가기를 권면한다.
히브리서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려진 희
생 제사를 교훈하면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
되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을 경고한다.
히브리서는 결코 선택을 근거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지 않다. 마태복음 마
지막 구절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
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
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
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약속의 성취로부
터 나오는 언약적 요구를 말씀하셨다.
2. ‘깨뜨리다’의 의미
언약이 깨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깨
뜨리다’는 히브리어는 구약에서 42번 나온다. 이 단어는 다른 단어와 관련
하여 사용되었는데 언약을 깨뜨리는 것, 계명을 깨뜨리는 것, 계획이나 충고
를 깨뜨리는 것 등등으로 쓰여진다.
칼빈은 언약의 상호적이
고 조건적인 양상 때문에 언약 자체가 깨어질 수 있
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것의 상호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보
답으로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믿는 자 안에서 볼 수 있다.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그의 로마서 11장 21절에 대한 논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는 백성이 감사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의 견인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칼빈은 의심하지 않는다(롬
11:22).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언약을 범하거나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언약을 깨
뜨리는 것은 인간이다. 로마서 11장 1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
과 언약 파기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그들을 거룩하다고 부른다. 칼빈
은 새 언약 시대에 언약 파기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심’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
들이 있다. 예레미야 33장 21절에 의하면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
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
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고 밝히고 있
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언
약들이 여호와께서 당신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에게 세운 언약을 파한다는
것은 언약이 훼손되는 정도가 아니라, 무효화 되고 파기될 수 있음에 대해
서 말한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이렇게 썼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
를 받았기 때문에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되었
다. 그 다음 에서가 제외되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 거의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Ⅲ,21,6).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문자로 온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데 언약 파
기가 가능한가? 칼빈은 로마서 11장 22절에 대한 해석에서 언약 파기가 존재
한다고 한다. 이것이 택함을 받는 자에게 발생할 수 없지만 심각한 경고가
필요하다. 육신의 자만을 쳐서 복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세례를 받으며 언약 안으로 들어갔으나 세례의 약속을 지키는
데 실패하였고 언약 파기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
비 안에서 우
리들을 언약 관계로 회복하셨다. 칼빈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자
신의 세례 서약에서 이탈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
리를 자신에게 연합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호의 관계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한다.
칼빈에 따르면 언약은 이스마엘과 에서와도 맺었다. 언약에는 반드시 지켜
야 하는 조건이 있으며 이스마엘과 에서는 언약적인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
는 것을 말한다. 언약은 택자와만 맺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 그
리고 신자와 모든 자녀와 맺은 것이다.
언약과 관련하여 언약적인 조건을 말하면 알미니안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
다. 알미니안의 문제점은 살아 있는 믿음이나, 회심, 순종과 같은 것을 사람
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
한 열매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의하면 새 언약 시대의 사람들도 타락할 수 있다. 고
린도 전서 16장 22절에 의하면 새 언약에도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있으며 언
약적 저주가 있다. 히브리서 3장 12절, 19절을 보면 새 언약 백성에게 불신
과 불순종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한다. 언약으로부터 끊어지고 버려질 자 가
운데는 위선자, 이단, 분리주의자 등이 있다.
3. 홀로 있는 믿음인가?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 그리고 그의 피로 사신
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중생하고 말씀으로 거룩케 되며 멸망으로 타락하기까
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믿음, 회개, 순종, 인내와 같은 언약
적인 요소들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전제할 때 조건이라 하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언약적 조건들은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구원의 근거나 원인이 되지 않으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의롭
게 하는 원인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일평생 순종하면서
산 사람이 있다면 의인일 것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면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까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
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들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용납
되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의’이다(요
1:12). 율법에 의한 ‘의’는 행위와 공로적인 것이라면 믿음에 의한 ‘의’
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여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이다.
물론 믿음은 행위 없이도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유일한 믿음의 도구를 통해서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의에 동참은 은혜로 이
루어진다. 그의 언약적 중보자로서 순종은 우리의 죄책과 형벌에서 자유하
게 하며, 영생의 권한을 얻게 한다. 이러한 면에서 칭의는 은혜의 행위가
아니며, 공의의 행위이다.
그러면 율법에 의한 의는 불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 31장 33
절이나 에스겔 36장 26,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켜 주실 때 마
음 판에 율법을 새겨 주신다고 한다. 신자가 성령에 의해 중생한 후에, 아무
리 노력을 하여도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는 없다. 또한 율법의 준수가 구
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 없는 믿음이 죄인을 의롭
게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칼빈은 틀린 것이라고 한다(겔 18:17 칼빈 주석).
왜냐하면 행위가 없는 신앙은 공허한 것이며, 믿음이 행위
가 없을 때는 이
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처럼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순종하
는 믿음이다. 이것은 칭의를 위해 믿음 더하기 행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신실함이며, 순종은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한 표현이
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홀로 있는 믿음이 아니다. ‘오직 믿음’(faith
alone)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오직 믿음으로’(by faith alone)라는 것이
중요하다.
야고보나 사도 바울이나 엣 언약 아래에서, 그리고 새 언약 아래에서의 칭의
는 동일하게 믿음으로 된다. 그러나 믿음은 의롭게 된 자 속에 홀로 존재하
지 않으며, 모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동반되며,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
으로 행함이 나타난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1장 2절).
언약관점에서 믿음과 회개는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어 죄를 슬퍼하고 미워
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
의 길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목적과 애씀이 없이는 참된 자비를 이해
할 수 있으며 용서가 있겠는가?
믿음과 회개와 새로운 순종은 구원이나 칭의의 원인
이나 근거는 아니지만 예
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언약적인 반응이다. 개혁주의
의 ‘오직 믿음으로’에 의한 칭의 교리는 이 믿음이 선행으로부터 고립되거
나 추상에 불과한 믿음을 의롭다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견고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죄인은 결코 정죄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언약 안에 있는 삶의 영역
에서 선택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을 것이기에 회개하고 순종
하라는 믿음 안에서 인내하라는 신자의 책임을 취소하지 않는다(마 24:13;
막 13:13).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에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나, 갈라디아서 5
장 6절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신자의 삶이 계속되는 실제다. 칼빈은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리켜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이라 한다. 우
리가 의를 얻는 믿음은 선행을 회피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한다.
로마가톨릭의 견해는 선행이 칭의에 있어서 적어도 한 부분의 기반이 된다
고 가르친다. 그들에 의하면 세례 시에 은혜가 주입되어 죄인이 의로운 사람
이 되는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칭
의는 성부의 행위이
며, 성화는 성령의 행위이다.
칭의는 공의의 행위이며, 이 행위는 우리와 상관이 없이 하늘에서 이루어지
며, 우리의 신분에 관한 것이다.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화는 우리 안
에서 일어나며 상태에 관한 것이다. 칭의는 죄책을 멀리 떠나게 하나, 성화
는 오염을 떠나게 한다. 칭의는 단 한 번, 완벽하게 일어난다. 성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일어나나 완성되지 않는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과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칭의 앞에 선행이 우선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언약과 그리스도와 연합관점에서 “나는 거룩한 삶 없
이, 믿음만을 통하여 그냥 의롭게 될 수는 없다고 유추한다… 죄사함과 성
화를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마치 그리스도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 버리
는 것이다”고 하였다. 칼빈은 ‘선행 없이는 의롭게 되지 않지만, 선행을
통하여도 의롭게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갈 5:6) 이외에는 어떤 다른
믿음도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칼빈이 이와 같
이 말할 때, 이는 행위가 칭의의 근거
나 도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칼빈
의 요지는 믿음의 유형이 무엇인가이다.
4. 믿음의 유형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은 머릿속의 추상적인 어떤 것도 아니며 의롭다하는 믿
음은 삶을 통하여 신실함으로 나타나는 실재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
롭다함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의롭다’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며 그 믿음
은 살았고 회개하는 능동적인 믿음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의 선행 공로로 착각하거나 영웅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으
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행위에 의한 칭의라 생각하여 정죄해서도 안 된다.
믿음의 유형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은 루터의
견해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주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값없이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전철을 따라가야 한다. 아브라함
의 순종은 순수한 믿음의 행위였고, 그의 순종은 공로적 순종이 아닌 믿음에
서 흘러나오는 순종이었다. 율법의 행위 없는 칭의(롬 3:8)를 가르치는 로
마
서에서조차 믿음에서 산출되는 순종을 요구한다(롬 1:5, 15:18, 16:26).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위한 권리를 스스로 획
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영생을 위해 행위 공로를 쌓으라고 요청하지 않
는다. 생명에 관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진다. 단지 성경은
당신의 백성에게 언약적인 회개와 사랑과 충성을 요청한다.
회개 없이 죄 용서가 있다고 해서도 안 된다. 주님은 회개를 칭의 이후나,
죄 용서 후에 주어진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
면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믿음이 없는 순종이나 순종이 없는 믿음은 의롭
다 함을 받거나 구원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믿음 더하기 행위 구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애매한 논리라고 해서도 안 된다.
행위가 없는 사람이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다(약 2:26). 그런 믿음이 구원할 수 있겠는가(약 2:14). 그런 믿음은 의
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약 2:24) 무익하다(약 2:20). 여기서 주의할 것은
칭의를 말할 때 야고보는 믿음에 의해서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칭
의를 단지
행위에 의해서라고도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이다. 언약의 진노가 그
리스도 안에서 보속되었으며, 그가 우리의 형벌과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리
스도의 순종과 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돌이킬 때 우리의 것이 된다.
야고보든 바울이든, 옛 언약이든 새 언약 아래에서든 우리 주님의 가르침 모
두 칭의의 방식에서 다르지 않다. 언약의 유익은 칭의와 성화이며, 칭의의
방식은 믿음이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
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이 그리스
도의 의를 간직한 것으로 선고되는 심판이다. 단지 그 믿음의 유형이 죽은
믿음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성경은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는 명령법이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그 분을 기쁘시게 할
일을 하도록 일하신다”고 한다. 이는 직설법이다. 직설법과 명령법이 함께
주어진다. 이 중에 하나가
빠지면 도덕주의자나 반 율법주의자가 된다. 이
권면에 의하면 새로운 순종의 삶은 칭의에서부터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
니라, 끊임없이(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요구되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믿는 자의 선행에서 전가되는 ‘선행-의로움’이 있다고 한다. 이
‘선행-의로움’은 결코 이신칭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종속적 의로
움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심지어 선행을 구원의 열등적 원인이라고 말한다.
언약이 갖는 유익의 상호적이고 불가분적인 성격 때문에 믿는 자에게 분명
히 두 종류의 의가 있다. 그러나 선행의 의로움은 칭의의 의로움에 종속적이
며 그래서 그것에 반대되지 않는다.
성화와 칭의는 서로 구별될 수 있으나 불가분 관계이다. 칭의는 그리스도 안
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며 오직 믿음으로 수납되나, 성화는 성령의 능
력을 통한 믿음과 율법의 순종으로 되어진다. 칭의는 성화의 의로움보다 우
월한 의로움이나 성화와 반대되지 않는다.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구원의 우
월적 원인이다. 의로워진 자 안에 믿음만이 있지 않으며 선행은 구원의 열
등 원인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지고 여겨짐
에도 불구하고 선행 없는 믿음은 효력이 없
기에 칼빈은 믿음이 선행 없이 의롭게 한다는 자체는 거짓이며 그 경우 믿음
은 죽은 것이고 단순히 허구가 된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신칭의에는 항
상 성령의 은혜로운 선물에 의하여 주어진 믿음에서 산출된 순종이 동반된
다.
사도 바울이나 칼빈의 견해는 최근까지 개혁주의 정통 진영 안에 압도적인
견해였다. 바빙크는 신자들이 살아있는 능동적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말한다. 역사하지 않는 믿음은 사단적이며 죽은 믿음이며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이 아니다.
마치는 말
은혜언약이 선택과 분리되면, 결국 그것은 은혜언약일 수가 없고 행위언약
이 되어 버리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칼빈은 택자들만이 언약의 자녀들이
며, 택자들만이 언약의 약속을 받는다는 개념을 지지한 사람들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칼빈은 언약의 자녀들을 둘로 구분했는데, 성경은 청중을 선택자
와 비 택자로 구분하지 않으며, 언약 관점에서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
녀에 대해서 말한다. 약속의 실제는 구원에로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있지 않
고, 오히려 약속의 성취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선택과 비 선택관점에서 구분하기 시작하면 성경을 편협하게 몰아가게 된
다. 모든 계시의 풍성함이 위축될 것이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선택과 비선택
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지 않는다. 만일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성경의 모든
구절을 이것은 택자에게 해당하는가, 비 택자에게 해당하는가 하는 식으로
매사에 구별을 해야 하니 얼마나 번거로우며 힘든 일인가. 오묘한 일은 그
분께 속한 것이며(신 29:29), 우리는 계시된 언약 안에 있는 삶에 대해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2항에서 성령께서 구원을 적용하시고 사취(전용)하신다
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참된 믿음을 일으키셔서 예
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고 그를 우리 자신의 소유로 만들
며, 또 그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도록 하신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3주일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의를 고백한다. 제60문답에서는 “나는 …단지 내가 믿는 마
음으로 이 선물을 받아들일 때에만” 이라고 첨언한다. 이와 같이 사취는 사
람의 일이며 개
인적인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신적인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면서 우리의 사역이 함께 간다.
언약교리는 주님의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책임
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설교는 은혜 언약의 약속과 그 요구를
모두 강조하여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운 영혼들과 자녀들의 마음을
넓히셔서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도록 간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