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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개혁 사상과 역사적 공헌
이승구 교수_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청교도 개혁사상은 “모든 신학적 논의가 성경으로부터
시작되고 성경으로 마쳐야 한다”는 원리 위에 서 있어
청교도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신들을 정죄했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삶”을 추구해
영국 엘리자베스 I세 여왕 시대의 종교적 관행과 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교
회의 예배와 교회의 통치 방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개신교도들이 비난 어린
어조로 1560년대부터 그렇게 불려지기 시작한 ‘청교도’(Precisians or
Puritans)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영국과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에서 나타나
고 전개된 청교도 운동은 사실 여러 면에서 매우 범위가 큰 운동이다.
청교도주의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 연대와 연합의 성격을 지
니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범위를 좁혀서 한국 장로교회에 가장 긍
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
단되는 청교도 사상에 대한 몇 가지 논의
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즉, “비록 청교도주의와 칼빈주의가 일치하지는 않
지만, 청교도적인 이상은 칼빈주의자들 내에서 보일 때 가장 잘 이해되었
다”는 오웬 채드윅의 표현에 동의하면서, 청교도 사상 가운데서 가장 칼빈
주의적인 사상과 실천을 이끌어 내어 그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1. 청교도의 가장 큰 기여: 성경 번역과 웨스트민스터표준 문서
청교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사랑한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
로 청교도주의를 “성경이 모든 것에 중심이라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한 릴
란드 라이켄의 말은 매우 정확한 말이다. 또한 “초기 청교도들은 누구인
가?” 하고 묻고는 “그들을 다른 영국 개신교도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근
본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고 말하는 데렉 윌슨도 옳
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려는 청교도들의 모든 기여는 성경에 대
한 그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1565년 파커(Matthew Parker) 대감독의 후원 하에 이루어져 1568
년에 나온 소위 주교 성경(The Bishop’s Bible) 보다는 엘
리자베뜨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비공식 역본이었던 1560년에 완성된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을 애호했고, 그에 따라 그들의 생각과 삶을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제네바 성경은 휘팅헴(William Whittingham)의 지도하에서 일단의 탈출자들
이 원문에 근거한 학문적 번역을 하고, 많은 주석을 붙여 만든 것이다. 그리
고 제임스 I세가 등극할 때 햄프턴 코트에서 왕을 알현한 청교도들과의 약속
에 따라서(1604년) 54명의 번역자들이 6단위로 나뉘어 옥스퍼드, 캠브리쥐,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번역하여 빌손과 스미스(Miles Smith)의 마지막 교
정을 통해서, 본래는 ‘주교 성경’(Bishop’s Bible)을 가볍게 개정하는 것
으로 시작되어 1611년에 그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번역본으로 완성된 KJV
이 세상에 등장하여 그것이 다른 영역본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기여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회의
(1643. 7. 1-1649. 2. 22)의 산물인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서도 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처음에는 39개조 신조를 개정
하는 정도의 작업을 하
려고 하였으나 새로운 신앙 고백서를 작성할 필요를
느껴 작성하여 1646년 11월 26일에 의회에 제출된 (그리하여 1647년 8월 27
일 스코틀랜드 총회에서 받아들여지고, 1648년 6월에 영국 의회에서 부분적
수정을 거쳐 받아들인 그러나 영국에서는 한번도 철저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
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그리고 대소요리 문답에서 그들은 자신들
이 믿는 바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이해를 제시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떤 이들이 제기하는 이상스러운 반론과는 달리, 그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믿는 바의 기초가 성경이며, 앞으로 논의해 나갈 모든 교리에 대한 최종적
판단 근거가 성경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
경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한 청교도들의 모습이 있
다. 그리고 여기 신학의 인식론적 기초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있다. 모든 신
학적 논의는 성경으로부터 시작되고 성경으로 마쳐져야 한다는 그들의 원리
가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는 매우 자명한 66권 성경의 각 책의 이름을 열거한
이유도 당시 천주교회나 루터파 신학자들이 오직 이 정경에 속한 책들로부터
만 신학적 논의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대가 숨겨 있는 것
이다. 이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제3항에서는 ‘외경’은 영감된 책들이
아니며 따라서 정경의 일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가 없음
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66권만을 성경에 속한 책으로 너무도 자
명하게 생각하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과연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사유를
성경에 근거하여 전개시키려고 하는가를 심각히 질문해야 한다.
2. 청교도적 예배의 개혁과 갱신
비단 칼빈주의적 청교도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공통
적인 노력의 하나는 자신들이 이해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예배를 개혁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분야보다도 무엇보다 먼저 특별히 예
배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전의 칼빈주의자들의 노
력과 보조를 같이 한 청교도들의 이런 예배 개혁은 기존의 예배에서 비성경
적이라고 판단된 부분을 제거하는
노력과 긍정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예배를
제시하는 적극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1) 청교도들이 개혁하려고 한 예배의 요소들
청교도들은 이전 칼빈주의자들의 강조점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면서 세례 예
배 때에 신부가 아기의 머리에 십자가를 긋는 것, 대부 대모를 세워 세례식
을 진행하는 것, 산파들이 세례하는 것 등을 비판하면서 개혁하려고 했다.
또한 주교가 견신례를 하고서야 성찬에 참여시키는 것, 성찬 때에 제단
(altar)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반복하여 제사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
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무릎을 끓고서 받는 것, 성체에 대해서와 제단에
대해서 끓어 절하는 것, 십자가에 대해서도 그리하는 것, 무릎 끓고 기도하
는 것,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중세 때의 독특한 의복을 착용하고 인도하는
것, 예배당에 십자가를 놓는 것, 예배 때 촛불을 밝히는 것과 향을 피우는
것을 의식적 행위로 만들어 시행하는 것, 심지어 성인들의 상에 대해서도 무
릎을 끓는 것 등의 중세적 사제주의에서 나온 미신적인 것들로 여기면서 거
부하였다.
이와 함께 숙련된 성가대, 벨을 울리는 것, 오
르간 연주 등을 예배 중에 금
지시켰다. 그리하여 루터와 칼빈의 가르친 성경적 원리에 따라서 청교도들
은 ‘제단’(altar)이라는 말을 폐하고 성찬상(table)이란 용어를 사용하였
고, 제사 드린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며, 제사장(사제)라는 말을 사
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혼인식도 성례가 아님을 강조하고 심지어 반지 끼우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했
을 정도이며 혼인식보다는 정혼을 좀더 강조하고, 장례 때에도 아무런 다른
의식을 행하지 않고 바로 장사하기를 선호했다. 천주교회에서 개발된 목회
적 의식들을 모두 미신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가운데서 폐하라고 한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에 대
해 충실하기 위해 그 동안 발전되어 거룩한 날들로 지켜 오던 40여일의 성자
들의 날들과 100여일의 금식일들을 6일 동안 힘써 일하라 하신 말씀에 근거
해서 폐하고, 심지어 성탄절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리쳐드
그린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부활절, 우리의 승천절, 우리
의 성령 강림절은 매주일이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예배당 창문의 스테인
드 글래스를 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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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청교도들은, 윌리스턴 워커가 잘 요약한 바와 같이, “로마적인 미신
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배에서 제거시키고, 모든 교구에 진지하고 영
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를 영입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이 파괴적이
거나 부정적인 이들이었기보다는 보다 긍정적 작업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보
여져야 한다. 그들이 이런 제안을 한 것도 결국 교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
된 것이다.
2) 예배 개혁에 대한 청교도들의 적극적(긍정적) 노력
청교도들은 미신적인 의식의 수행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공적이고도 연속적
인 설교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일상적
인 수단과 방도’라는 것을 강조했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원문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해석에 근거해서
교리와 실천적인 적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경
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성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으로부터 찾아 전달하
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는 당대의 상황 가운데서는 매우 중요한 공헌이었으니, 예를 들어서 엘리
자베뜨 I세는 온 나라에 설교자가 3-4명이면 족하다고도 생각하고 있는
상황
이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에게는 설교자와 설교 사역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
다. 그러므로 “말로 하는 것이나 글로 하는 것이나 설교는 청교도들에게 생
명이었다”는 뉴(New)의 말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월져는 설교자가 ‘16세기 청교도의 영웅’이었
다고도 표현했다. 이것은 청교도 설교자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사명을 잘 감
당했다는 것도 표현하지만 동시에 일반 성도들이 때로는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먼 곳까지 가서 주일이나 주간 중에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에 힘썼다는 말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설교할 사람들을 잘 훈련할 수 있는 교육 기관에 대한 관
심이 대단하였다. 청교도들은 심지어 그들의 교회 건물까지도 설교를 중심으
로 재구성하였다. 그래서 제임스 화이트는 청교도 예배당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깨끗하고 조명이 잘된 예배당은 청교도 예배의 본질적
인 것에 집중하였으니, 그것은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를 말하고 확정한 것이
예배에 대한 청교도들의 가장 큰 공헌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
직 성경으로부터만 예배의 요소들을 찾아 그에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성경에 없는 데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배의 요소들
을 전부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 한정되어
있다”고 믿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교도는 “성경은 하나님의 예배에서 실천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 안에 규정되지 않은 그 어
떤 다른 방법이 그 어떤 방식으로 제안되어도 그것은 옳지 않은 예배의 방법
이라고 한 것이다: “말씀되어진 말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불법적인 것이다.”
이런 규정적 원리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제시하려고 한 대표적인 예의 하나
를 위는 토마스 카트라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예배의 구체적인 것
들이 그에 따라 규정되어야만 하는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① 첫
째는 그 누구도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전
10:32), ② 둘째는 모든 것이
질서 가운데서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한
다(고전 14:40), ③ 셋째는 모든 것이 건덕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전
14:26), 그리고 ④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져야만
한다.
청교도들은 그런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게 자신들이 제안하는 예배 모범
(Directory for Public Worship)을 제시하기도 했다. 1644년 작성되어 의회
에 제출되어서 1645년 1월에 영국 의회가 기도서를 폐지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예배 모범은 이전의 영국 교회의 기도서(Prayer Book)와는 달리 한편으로
는 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충실한 것이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양심의 자유를
충분히 고려한 예배 모범의 제시였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배의 순서 등을 구
체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성경의 원리에 근
거한 모범을 제시하여 이에 따라 주님을 경배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의 예배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예배는 ① 성
경에 대한 깊은 존중과 ② 경배자들의 상태에 대한 적합성에 대한 고려가 작
용하고 있었으며, ③ 그들이 예배를 즐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홀
톤 데이비스 같은 이는 청교도 예배가 “순수성(purity), 단순성
(simplicity), 그리고 경건함(spirituality)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오순절적 열심과 사도적 교회의 기대를 재창조하려는 시도
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청교도의 예배나 그들이 존중한 성경적 원리에 따른 예배가 생기
있고, 사람을 살게 하며, 주께 더 헌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교회 제도의 청교도적 개혁
상당히 많은 청교도들이 문제삼은 것이 교회 제도였다. 특히 감독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화 제도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그들은 묻기 시작했다. 물론 초
기에는 주교 제도의 성경적 근거를 의문시하는 목소리와 주교 제도를 용인하
는 것이 공존했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청교도적인 사람들이 감독(주교)의 자
리에 올라 그런 식으로 교회를 개혁할 생각도 하였으나, 뛰어난 청교도들이
주교의 자리를 거절하고 후에는 정부가 청교도들을 주교 제도를 사용하여 청
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자 주교 제도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해졌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모든 설교자들의 동등성을 선호했다.
즉, 그들은 ‘영
적 직책 맡은 자들의 본질적 동등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
은 당대나 지금의 주교 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과는 대착적인 것이 아
닐 수 없다. 주교 제도의 신봉자의 한 사람인 로드(William Laud)가 “주교
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그 권위를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다”고
주장했던 것과 대조하면, 청교도들은 칼빈주의에 충실한 교직관을 드러내면
서 모든 직분의 동등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함께 마태복음 18:17 등과 같은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치리에 대한 강
조가 청교도들의 교회 제도 개혁의 큰 관심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왕이라도
이런 영적인 치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모든 점에서 청교
도들은 성경에 순종하려고 했고, 자신들이 그 어떤 신학적 운동을 따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성경에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결과로 제시된 장로교적 제안들과 1646년 3월
에 의회에서 의견의 일치에 이른 영국 전역에 걸쳐서 노회를 세우기로 한
것 등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부터도 혹시 출교당한
이들은 의회 위원회
(parliamentary committee)에 호소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
을 분명히 하였다.
4. 청교도 강의 혹은 강해의 전통
소위 청교도강해(the puritan lectureship)의 전통은 ① 교회 개혁의 중요
한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과 ② 그런데 모든 목회자
들이 다 신실한 강해자이지 않다는 당대의 현실 가운데서 나온 일종의 고육
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청교도들은 때때로 강해자(lecturer)들을 따로 선정해
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다. 특히 소위 담임 목사가 (그
당시의 용어로는 십일조를 받는 사제가) (적어도 청교도들이 듣기에는) 하나
님 말씀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dumb) 상황일 때에는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경비를 따로 내면서까지 이런 청교도 강해의 전통을 만들고 감당한 것이다.
이들 강해자(lecturer)들은 회중에 의해서 초빙되어서 교회의 정규 예배 시
간이 아닌 시간에도 강의를 하곤 했었고, 청교도들은 이런 강의를 매우 존중
하며 그 일을 위해 재정적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
다. 이는 또 한편으로는 당대 제도화된 교회의 “규정된 방식
으로는 성례를
양심적으로 집행할 수 없는 설교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게 해 준 효력이 입증된 청교도들의 방식이었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대한 열심과 이 제도가 신축성 있게
사용될 수 있는 제도였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설교 예배
는 상당히 길고 깊이가 있었으며 대개 이웃의 청교도 회중의 목사님들과 회
중들이 많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는 청교도 설교나 청교도 사상을 표현하는
논집들의 출판과도 깊이 연관시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5. 청교도적인 삶
청교도의 삶에 대한 이해도 성경에 따라 그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 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모두 옳은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삶은 아주 풍성한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
다.
그들에게는 지켜야할 규칙이 너무 많고 그래서 율법주의적인 삶의 스타일을
가지기 쉬웠고, 무엇을 설명하는 말이 너무 많았으며, 남자 중심적인 특성
을 나타냈고, 자신들의 의에 너무 빠지기 쉬워 다른 이들의 감정에 대해 민
감하지 못한 경우들도 있었으며, 지나치게 극
단적으로 나아가는 문제를 가지
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의 삶은 많
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숨막히는 삶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청교
도들이 모든 스포츠를 근본적으로 싫어하거나 멀리한 것은 아니다. 청교도들
이 정권을 차지했던 1647년의 한 의회 법령에 의하면 매달 매 두 번째 화요
일은 모든 상점 직장 등이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문으로 닫고 공휴일
로 하여 노동자들의 리크레이션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
은 “여가 없는 …. 유토피아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마이클 월져의 말은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청교도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 삶 전체를 조망하며 그 안에서 자유
를 누리는 삶의 17세기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삶을
신약 성경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 개혁하도록 담대하게 줄기차게” 논의하였
다. 여기서 초기 개혁자들의 사상을 잇는 소명론이 강조된 것이다. 1584년
윌리엄 펄킨스(William Perkins)의 성경에 근거한 실천적 신학(practical
divinity) 제시의 한 부분으로 성도들로 하여
금 그들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인하도록 하는 ‘소명론’(Treatise of Vocations)이 그 하나
의 예이다.
이렇게 모든 측면에서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서 청교도들은 흔히 다른 이들
을 비판하는 바리새적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다른 이들 보다는 자신들을 정
죄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능력 주시기를 위해 기도했
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가정과 그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정 예배가 매
우 중요했고, 가장이 인도하는 가정 예배가 이들의 기독교적인 삶을 가능하
게 하고 유지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이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강조한 바를 다시 상기시킨다면 청교도 운동은
다양한 성향과 사상과 분위기를 가진 운동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
청교도 사상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성경적인 사상을 잘 드러내
고, (혹시라도 그런 것이 있다면) 오늘날 더 밝히 이해된 성경의 빛에서 그
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는 “칼빈주
의 청교도의 제왕 죤 오웬”이라는 제목의 논
의를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는 성경에 대한 청교도들의 헌신과 사랑, 성경에 근거해서 자신들
의 믿는 바를 고치고, 이를 위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훈을 정확히 표현
해보려고 한 것, 또한 성경에 근거해서 예배와 교회 조직과 삶을 개혁하려
고 한 것들을 강조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개혁파적인 청교도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으로 강조되
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