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가정교회와 장로교신학<2>_김병훈 교수

0
103

 

 
긴 | 급 | 진 | 단

가정교회와 장로교신학 <2>

김병훈 교수_합신 조직신학

최근 ‘가정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8월 24일 개최
된 4개 장로교단 세미나에서는 ‘가정교회’에 대해 장로교신학적 입장에서 
비평이 시도되었다. 당일 발표된 ‘가정교회와 장로교신학’을 지난호에 이
어 연재한다_ 편집자주

‘가정교회’로 불리는 소그룹 모임을 ‘교회’라 할 수 없어
교회의 직원은 교회 공동체에 의한 선출방식 통해 세워야
봉사와 섬김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 직원의 직무

I.‘목자’의 권한과 책임, 호칭 문제

‘가정교회사역원’은 반드시 ‘목장’ ‘목자’ ‘목녀’ ‘초원지기’ 등
의 용어를 통일하여 사용할 것을 요구하며 그럴 경우에 한 하여 ‘가정교
회’ 네트웍에 참여를 허락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운동을 하는 
교회들의 정체성을 형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들이 다소 생소하
기 때문에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교 신학에 비추어 이러한 용어들의 사용을 어떻게 판단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약간의 구별된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선 소위 ‘가정교회’의 모임을 ‘목장’이라 부르는 것은 별 문제가 없
어 보입니다. 교회 안의 소그룹을 제자훈련을 위한 ‘다락방’모임이라고 부
르는 것이 별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소 조심해야 할 점은 
‘목자’와 같은 사역자를 가리키는 말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가정교
회’ 사역을 도입한 어느 교회의 목사님은 ‘목자’는 단지 주일학교 ‘교
사’와 같은 개념일 뿐이기 때문에 장로의 직분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
이 아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인 장로님이 계시는 것처럼, 목자
인 장로님이 계실 수 있음을 말합니다. 

‘목자’를 ‘교사’ 또는 ‘구역장’의 것과 같이 이해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자의 사역적 권한과 책임이 너무나 크고 
중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누구도 ‘목자’를 마치 ‘장로’나 ‘집사’와 
같은 항존 직분으로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이에 따라서는 ‘
목자’를 준
비하는 직원인 ‘강도사’나 ‘목회자 후보생’으로 혹은 임시 직원인 ‘전
도사’ 또는 ‘권사’나 ‘서리집사’로 이해하여 교회의 직원 가운데 하나
로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해봄직 하지 않은지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소위 ‘가정교회’ 운동이 ‘목자’에게 부여하는 사역의 권한과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비롯된 생각일 것입니다. 
장로교 교회론에 따르면 목회적 사역의 책임을 목사와 함께 나누며 예배, 교
육, 친교, 전도, 선교 등 지역교회의 모든 사역을 다 감당해야 하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은 자라면 마땅히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직원이 되어야 합니
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직원을 교회에 두신 까닭은 이러한 
목양의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목회적 사
역은 교회의 직원을 통하여 실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장로교회가 이해하
는 직분론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
편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교회의 사역’(ministerium 
ecclesiasticum)이며 이것을 감당토록 직원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
고 장로
교 교회정치 헌법은, 칼빈이 교훈한 바에 따라서(기독교 강요 4.3.15), 교회
의 직원에게 위임되는 사역의 중요성에 비추어 교회의 직원은 목사에 의한 
임명의 방식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의한 선출의 방식을 통해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 성경적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제직과 평신도를 구분하는 천주교회의 그릇된 이원론적 이해를 거절하면
서 루터가 주장한 만인 제사장론은 교회 안에 사역적 질서를 세우는 직원의 
선출과 위임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교 목사는 ‘가정교회사역원’이 말하는 ‘가정교회’의 사역을 그대로 
받으면서 그것을 담당할 ‘목자’를 하나의 주일학교 교사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목자’를 목사의 권위로 임명하여 목양의 권한을 부여하는 일
을 삼가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한을 무시하는 것은 17세기 개혁
파 회중교회에서조차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며 침례교나 성결교 회중교회에
서나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누구라도 상담, 위로, 교육을 실제로 행하지 않는가라는 반문은 의미
가 없습니다. ‘가정교회’ 혹은 ‘목장
’은 ‘가정교회사역원’의 주장대로
라면 하나의 개척교회와 같은 ‘교회’이며, 아무리 줄여 말해도 교회의 공
식 기관이기 때문에 ‘목자’의 직무는 공적인 것이지 사적이지 않기 때문입
니다.

그렇다면 ‘가정교회’ 운동을 수용하는 장로교 목사는 ‘목자’의 직분을 
다음의 두 가지 경우들 가운데 하나와 관련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
나는 교회의 직원인 장로로서의 직무를 감당하는 목회적 방편으로 ‘목자’
의 역할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교회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장로의 권한과 직무를 어떠한 방식으로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서 ‘목자’의 사역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장로가 된다는 것이 단지 치리의 결정권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봉
사와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인 만큼, 그 방편으로 장로님들에게 
‘목자’의 사역이라는 목회 실천적 방안을 충실히 감당하도록 요구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목자’를 최소한 ‘권사’나 ‘전도사’와 같은 임시 직원
으로 인정을 하여 사역의 권한과 책임에 일치하는 자격 심사와 선출 과정이 
있도록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안수 없이 일정한 임기를 두
어 임시 직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안은 개교회의 당회의 결정만으로도 시행이 가능하겠지만, 두 번째 
안은 노회를 거쳐서 총회적 차원의 헌법적 논의가 이루어져야만 시행이 가능
할 것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치리회와 ‘목장’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리고 
‘목자’는 직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사역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지니고 있
으므로 첫 번째 방안이 더 권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장’은 영적인 격려와 나눔을 위해 모이는 자리 돼야
교회의 치리는 당회의 고유권한이며 영적부흥 장려해야
장로교 교회론에 일치하는 창의적 방법론으로 접근하길

II. 치리회와 ‘목장’의 관계성

‘가정교회사역원’은 ‘목자’들이 모이는 ‘목자 총 모임’을 월 1회씩 갖
도록 하여 목장 사역에 관한 제반 사항을 논의토록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
면 성도의 영적 형편, 심방 및 위로의 사역의 필요성과 사역 결과, 새로운 
신자의 전도와 교육, 선교 등 목양에 관련한 본질적이며 핵심적인 논의가 
‘목자 총 모임’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장로교 교회의 당회는 교회 행정과 행사에 관련한 제반 사
항만을 결정하는 기관이 됩니다. 혹시라도 ‘목자 총 모임’을 중심으로 목
회할 경우 ‘당회’와의 충돌이 있을 수 있음을 염려하는 분들에게 ‘가정교
회’ 사역을 하는 목사님들은 직무가 분장이 되어 있어서 충돌의 염려가 없
다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나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에 의하면 교인들의 영적 형편을 돌아보는 사무
와 또 당회 산하의 각 기관을 감독하고 이들의 영적 부흥을 장려하는 모든 
일들이 당회의 직무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직무의 분장이라는 답은 장로
교회로서는 받을만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원론적으로 ‘목자 총 
모임’은 ‘당회’의 중심적인 기능과 중복이 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로님들이 ‘목자’ 또는 
‘초원지기’의 사역을 감당하여 ‘목장’의 형편을 마치 구역제도의 교구장
처럼 파악하여 당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목자 총 모임’은 모일 수 있지
만 ‘당회’와 같은 치리회일 수가 없으므로 ‘목장’ 사역과 관련한 무엇
을 결정하기보다는 사역과 관련하여 영적인 격려와 나눔을 갖
는 의미로 모여
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목자’의 직분과 관련하여 두 번째 방안처
럼 임시 직원으로 ‘목자’를 두어 ‘목장’을 운영을 하며, 그 ‘목자’에 
대한 교육 및 지도를 목사가 전담케 될 경우 실질적인 목양을 위한 목회적 
논의가 목사와 ‘목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
우 자연히 장로들은 목양의 본질적 사역에서 소외가 되게 됩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장로의 직원을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하지 않으며,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이 정하는 교회 직원의 이해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치리회인 당회의 장로회원들은 임시 직원인 ‘목
자’들의 일정 수를 감독하며 섬기는 소위 ‘초원지기’를 반드시 담당토록 
함으로써 목사와 목자로 이어지는 목양의 중심축에서 장로들이 소외되는 일
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방안을 장로교 목사는 반드시 모색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회와 ‘목장 총 모임’의 직무가 이분화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장로교 교회론에 비추어 ‘목장’이라는 소그룹은 ‘교

’가 아니라 당회의 치리 아래에 있는 교회의 부속기관이어야 하기 때문입
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목장’ 
모임이 교회의 한 부속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라면, 주일에 전 ‘목
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연합목장’ 곧 ‘연합교회’를 이루어야 예배
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사역원’은 ‘가정교회’란 가정에서 모여 예배, 교육, 친교, 전
도, 선교 등 지역 교회의 직능을 다하는 교회로서 신약교회의 회복을 목표
로 한다고 설명을 하는데, 과연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에서 모이는 여
러 가정교회들이 매 주일마다 모두 동일한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는 성경적 증거는 분명치 않기 때문에(홍인규, “바울과 가정교회”, 238;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의미분석”) 왜 각 ‘가정교회’들이 
‘연합교회’로 매 주일마다 모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요구
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가정교회사역원’이 제시하고 있는 설명은 “목장에서 
맛볼 수 없는 은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
니다. “은혜의 기회”가 어
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가정교회사역원’은 다음의 네 가지의 예를 들고 있
습니다: (1) 목원 전체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은혜의 경험, (2) ‘삶 공
부 시리즈’를 공부할 기회의 제공, (3) 어린이 주일학교 운영, (4) 목장 선
교 활동을 돕는 선교국 운영. 이러한 설명은 ‘실용적’일 뿐, 신학적이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목원 전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자리가 은혜보다는 갈
등을 경험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성경공부의 모임을 ‘목장’에서 별
도의 모임을 만들어 갖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목장’이 전 가
족들이 함께 드리기를 원함으로써 주일학교의 필요가 줄어들면, ‘목장’이 
자체적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모아 선교활동을 감당한다면, 이미 
교회인 ‘가정교회’가 ‘연합목장’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할 뚜렷한 이
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현재 ‘가정교회’ 운동을 하는 교회들 가운데서 ‘목장’의 분열 현상이 나
타나지 않는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이미 확립된 개교회 안에서 소그룹의 한 
형태로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용적 
이유가 불분명해
지면 왜 ‘목장’이 독립된 개체로 발전되어 가지 못하고 ‘연합교회’의 아
래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연적으로 제기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교회’에 이단이 침투하여 활동하게 되면 이로 인한 ‘가정교
회’의 이탈과 영혼의 상실 등이라는 엄청난 위기가 현실화 될 우려도 매우 
높게 될 것입니다. 장로교 목사가 ‘가정교회’의 개념을 비판없이 수용하
여 교회론적 기반을 실용적인 가치로 전락시키거나 교인의 영혼을 흉악한 이
단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기회를 열어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목장’들이 ‘연합교회’의 형태로 매 주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실제
적인 이유는 ‘목자’가 독립된 사역자들이 아니라 목사에 의하여 임명을 받
은 ‘일반 성도’라는 사실과 관계가 깊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목사는 
‘목장’을 위임받은 ‘목자’를 세우며 이들을 훈련시키는 실제적인 권한
과 책임을 홀로 짊어지고 있으므로 ‘가정교회’ 사역과 관련한 전권을 갖
게 됩니다. 
그런 만큼 ‘목자’들은 목사를 크게 의존하게 되며 ‘연합교회’와 ‘가정
교회’의 관계 또는 목사와 ‘목자’의 관
계는 일종의 감독정치 체제의 성격
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비록 ‘연합교회’가 약속한 ‘은혜의 경험’을 주
지 못함으로 ‘연합교회’로 모여야 할 실용적 이유가 약하더라도 ‘가정교
회’로 하여금 어느 정도 여전히 ‘연합교회’로 모일 수 있게 하는 교회론
적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개교회 안에서의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감독체제를 장로교 목사는 인
정하여서는 안 됩니다.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에 명시되어 있듯이, 교회의 치
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를 비롯한 치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
는 자신의 사역을 당회를 통하여 시행하며 노회로부터 시찰을 받아야 한다
는 것이 장로교 교회정치의 원리인 것입니다. 

III. 결론

‘가정교회사역원’을 설립하여 주창하는 ‘가정교회’ 운동은 그 필요성에 
관하여 신약 교회를 회복함으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성경적인 교회
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최영기 목사는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단 불신자를 구원하는 전도의 높은 효과뿐만 아니라 ‘가정교회’ 교인들
이 서로의 삶을 나누며 영적 친교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게 되며, 아울러 선

교의식도 고양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강조한 바가 ‘가정교회’ 운동에 동참하는 교회들에게서 사실로 
확인이 되고 있다고 전하여 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정교회’를 수용하
여 자신의 목회에 적용을 하여 성공한(?) 몇 분의 목사님들은 물론 장로님들
도 자신들이 ‘가정교회’를 통하여 커다란 목회적인 혹은 교회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증언을 합니다. 

대략의 이유는 불신자들의 전도로 인한 영혼 구원의 열매가 늘었고, 또 교인
들 사이에 살아있는 신앙의 간증이 왕성해지게 되었으며, 특별히 서로를 섬
기는 사랑의 사귐이 영글어가고, 선교적 열정이 높아짐을 경험한다는 것입니
다. 이 분들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모든 성도들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
다. 
‘가정교회’ 운동은 개인주의, 물질주의, 성장제일주의, 실용주의에 젖어가
는 한국 교회의 일반 현상을 비평하는 교회 개혁의 의미를 지니는 한 편, 무
엇보다도 전도의 능력이 위축되어버린 한국 교회에 관계에 기초한 전도의 능
력을 새롭게 불어 넣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영적 의미에서 ‘성도의 교통’을 상실한 한국 
교회에 
대하여 몇 몇 가정들이 모이는 소규모의 교제의 장을 열어 그곳에서 성도간
의 친밀한 영적 사귐이 있도록 하며 아울러 믿지 않는 자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간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가장 시급하면서도 절실한 필요가 아
닐 수 없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최영기 목사가 주창하는 ‘가정교회’ 운동의 취지와 방법
론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미 장로교회의 직분론이 
‘가정교회’ 운동이 의도하는 성도 서로간의 사귐과 불신자를 향한 구령의 
열정 등을 잘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 있어서 이러한 직분
론이 열매로 나타나도록 도와주는 목회적 지혜와 방편들이 몹시 필요합니
다. 
이미 감리교에게서 ‘구역조직’을, 선교단체에게서 ‘제자훈련’ 등의 신
자 양육 방법들을 장로교 교회정치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회
의 연약한 부분을 돕는 귀한 방법으로 장로교회가 받아들인 사례가 있습니
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정교회’ 운동을 차용하여 장로교회의 교회론에 일
치하도록 창의적으로 변형하여 적용하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드린 내용은 ‘가정교회’ 운동의 수용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교회’ 운동이 하나의 목회적 방편으로 적용할만한 
매우 소중한 자산임을 지적하면서, 다만 ‘가정교회’ 운동의 수용을 위하
여 있어야만 하는 창의적 변형을 위한 신학적 사고의 시작을 시도해본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논의가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장로교회 정치 원리에 
일치하는 적절한 모습의 ‘목장’ 운동이 잘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척
박한 목회 일선에서 헌신의 땀을 흘리시는 목사님들의 목회 사역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