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언| “다양한 욕구 충족해야 하나?” 이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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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언

“다양한 욕구 충족해야 하나?”

이정석 목사/ 풀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시작하는 말

급변하는 현대 문화 속에서 교회의 예배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각성이 대두되
고 있다. 그리하여 예배갱신, 예배개혁 혹은 예배회복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예배의 변화가 한국교회에도 선풍처럼 번지고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예배에 만족하였고 문제를 느끼지 않
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치열한 산업
경쟁사회로 진입하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예배에 불만이 표출되었
다. 사경회의 전통이 오순절적 부흥회와 기도원 운동, 은사집회 등으로 전환
되었다. 그러한 성령집회에 익숙해진 신도들은 전통적인 예배로 만족하지 않
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기성교회의 교인들이 오순절계의 교회로 이동하거
나 자기 교회의 예배를 오순절계 예배 방식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I. 예배의 위기를 느끼
는 한국교회

70년대부터 시작된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의 보편화는 80년대에 거부할 수 없
는 대세로 정착하였다. 80년대의 교회성장운동은 목회자 세미나의 홍수시대
를 열었고 각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90년대는 세기말적 위기감과 새로
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사회의 대세인 정보화와 테크놀로지의 수용문제
가 대두되었다. 
대교회들은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교회전산화
를 추진하였고 위성중계 시스템을 설치하여 위성교회들을 만들고 있다. 멀티
미디어 예배와 사이버 교회가 선을 보이고 대중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문화사역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예배에 대중적인 음악 이외에도 연극이나 무
용 등의 예술적 장르를 도입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예배의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 예배에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참석이 하나의 종교적 의
무로 인식되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참아낼 뿐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도 받지 못
한다. 
급성장하던 한국교
회는 정체를 보이고 청소년들은 교회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대중문화가 그들에게 충분하
고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의미도 재미도 없다. 대다
수의 교인들에게 교회 생활이란 예배의 참석을 의미하는데 예배가 적용성
(relevance)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시대에서 프리모던적 예배는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실패하는데 이는 문화형식의 이질성 때문이다.
또 다른 예배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예배
의 양면성에서 인간의 종교적 만족이라는 한 면으로 너무 치우치기 때문에 일
어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의 교제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다(요일 1.3). 예배의 궁극적 목적이 신의 흠향과 영광에 있기 때문에 아무
리 예배 참석자들이 열정적 축제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열납이 일차
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국 예배의 실패를 결과한다. 개혁교회는 이런 문
제를 성찰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칼빈의 예배론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II. 칼빈의 예배 개혁

교회역사상 가장 큰 예배의 위기는 중세
에 발생하였으며 종교개혁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한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 개혁이며 예배 개혁이였다. 마르
틴 루터가 보다 이신칭의교리에 근거한 교리중심의 개혁자였다면 칼빈의 일차
적 관심은 오염된 예배의 개혁과 회복에 있었다. 칼빈이 1544년 로마제국회의
에 제출한 “교회 개혁의 필요성” 제하의 변증서에서 그가 왜 교회 개혁에 참
여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설명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너무나도 많은 잘못된 의견들에 의해 손상되었고 너
무나 많은 불경하고 부정한 미신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흉악한 오만무례로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으며 그의 영광
이 발아래 짓밟히고 있다. 오호라, 모든 기독교 세계는 공개적으로 우상숭배
에 의해 오염되었고 사람들은 그대신 자기들의 허구를 숭배하고 있다. 수천
의 미신들이 지배하고 있다!”({칼빈선집} 1.232) 
물론 칼빈은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통적
인 예배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으며 살과 피속에 그리고 골수에 박혀 있기 때
문에 그들을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설령 이론적으로 
동의한다 할지
라도 실제적인 난관이 있다(128-9). 그러나 칼빈은 이 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
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여러 모양으로 난자당하고 있는데 만
일 우리가 미소나 짓고 침묵한다면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도 자기 
주인에게 함부로 하면 즉시 짖어대는데 우리가 침묵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
름이 그토록 모독적으로 경멸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189)
칼빈은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데 예배가 타락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참
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구별한다. 로마교회의 우상숭배가 그릇된 예배의 전
형이라고 생각하고 제1권 11-12장에서 집중적으로 우상예배를 비판한다. 
참된 예배는 로마서 12:1-3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로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하였다
(II.viii.17). 칼빈은 4권 10장에서 그릇된 예배의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였
다. ①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
배(24), ②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
(마 15:9; 사 29:13-14), ③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
(골 2:4-8)가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
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예배의 왜곡이다. 

III. 칼빈이 지적한 잘못된 예배 형태들

① 칼빈은 골 2:23의 “자의적 숭배”(will worship, ethelothreskeia)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혹독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종
교적 철저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
교였다. 자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
에게는 그릇된 예배이다. 비록 그 시대 사람들의 종교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
시키고 그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며 그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할지
라도 올바른 예배가 아니며 인간 중심적인 자기 예배일뿐이다. 
②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이다(26). 칼빈은 “바리세인의 누룩”(마 23:3; 
r
16:6)을 조심하라고 경계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로
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
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
배라고 규정한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
운 죽은 예배가 여기에 속한다. 
③ 셋째는 연극적 예배다(29).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
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 배우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멋있는 예배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
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명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순간적
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
중히 생각하고 흠모할 뿐이다.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심리
적 조작에 의한 유사 경험일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
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 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오늘날의 개신 교회 예배는 칼빈의 예
배 개혁을 통하여 정착된 형태이다.

마치는 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은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대하여” 고백하는
데, 여기 나타난 예배론은 다음과 같다.
① 예배는 자연계시가 보여주는 신의 주권과 선하심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반
응이다. 
② 예배의 방식은 성경에 규정되어 있다. 
③ 예배의 대상은 오로지 삼위 하나님으로 제한되며, 그리스도의 중보를 필요
로 한다. 
바른 예배란 ① 그 대상이 배타적으로 삼위 하나님에 한정된다. ② 그 계기
는 신의 위엄과 영광, 거룩과 능력에 접하여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성
을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신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이다. 
③ 그 자세는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그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사랑
과 경외심에서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절대 복종의 표현이다. ④ 그 방법은 제
r
사, 봉헌, 찬양, 기도, 말씀, 성례의 의식과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명
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⑤ 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