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 대한 향수_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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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에 대한 향수

이광호 목사/ 대구 실로암교회

세속적인 성공보다 천국의 소망부터 배우자
참된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 가치 입증해야

우리시대의 한국 교회가 기독교 내부는 물론 일반 사회로부터도 지탄의 대상
이 되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교권다툼, 신학자들의 눈치보기, 
기독교 기관들의 재정 비리 등 심각한 문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에
는 일부 목회자들의 억대 연봉문제가 불거지면서 드러난 목회자들 사이의 엄
청난 빈부격차를 보며 우리시대 한국교회는 이미 말씀으로 인한 그 좌표를 상
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암울한 느낌마저 든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기독교 기관들이 일반사회 지도자들이나 단체들에 비해 도
리어 더 부패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어떤 분
이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모든 기관들은 전부 심도 있는 감사를 해야한다”
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어떤 사회기관이나 종교단체의 경우 감사
의 필요성이 없을 만큼 깨끗
한 데 비해 기독교 목사나 장로들이 경영하는 기
관들은 부정과 부패 투성이라는 것이다.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신학교도 다르
지 않다는 말을 빼지 않았다.

교회 본질 잃어가고 있는 실정
그 정도나 구체성 여부에 대해서는 그만 두고서라도 그 말은 가히 충격적이
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만
큼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기독교 기관들이나 단체들의 비리
나 부정직함을 끊임없이 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짧은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자랑거리를 만들어왔던 한국교회가 어
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순수한 신앙적 삶을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럽다. 비단 필자 뿐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초대
교회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을 표제로 삼고 있는 교회들도 많이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웬만한 설교자들이라면 이런 제목의 설교를 최소
한 한 두 번은 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이
라면 이와 비슷한 주제의 설교를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회 본질 회복해야
그런데 초대교회에 돌아가자는 의미가 무엇인가? 어떻게 함으로써 우리가 초
대교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부러워하는 초대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던가? 

초대교회라 함은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
인하기 이전의 교회시대를 일컫는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전의 시대의 교회는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말하자
면 생활이 형편없는 시기였다. 교회 밖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성도들을 좋
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범죄행위였으
며,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극히 꺼려했으며 싫어했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지하교회에서 극도의 궁핍한 생활을 했으
며 카타콤과 같은 깜깜한 지하에서 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
다. 그들은 먹을 양식이 풍부하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병이 들어도 자
유롭게 병원에 갈 수도 없는 형편에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사랑하는 가족이
나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진한 외로움을 이겨냈어야 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자
가 될 수도 없었으며 성공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자
녀들을 훌륭하게 키워 출세시킬 마음 따위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설령 그런 
바램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세상의 그런 것들을 얻어 움켜쥐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식
의 신앙적 사고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주님만이 소망
이었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재림 밖에 없었다.

주님만 바라 본 초대교회
흔히들 초대교회에는 사랑이 많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시대에 초대교회
로 돌아가자는 음성들을 높이는 까닭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이 없다고 판단하
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마약성을 익히 알고 있다. 사랑의 감성은 
그 속성상 객관적이지 않다. 이성간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사랑은 눈
을 멀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의미는 판단력을 흐리
게 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감성적 
혼돈 가운데 둠으로써 잘못된 사실마저도 수용토록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옛 말에 “눈이 멀면 곰보도 예뻐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는 특정 외모를 
가진 분들을 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기 위함이니 양해를 구한
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서 생겨난 사랑은 주관적이므로 믿을 바가 못된
다. 그런데도 우리는 초대교회를 그런 교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우리 주변에 범람하는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니
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사랑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의 부족한 양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
도로 인해 제시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어떤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돈을 탐하고 남들 보다 부자로 사는 
것을 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교인들을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 자기나 자녀
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지도자들이 
그러니 일반 성도들은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대로 그런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하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
한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가난하니 연보도 많이 할 수 없으
며 장로도 될 수 없다. 우리는 돈이 있고 세상적으로 내놓을 
만한 것이 있어
야만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아주 이상한 기독교 시대에 살고 있다.
감상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성경이 언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던가? 성경에서는 그런 가르침을 주지 않
는다. 성경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천국을 유일한 소망으로 알며 이 세상에
서는 나그네로 살았다. 우리도 이제는 그런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한국교회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 
이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이 세상과 짝하여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부끄러
움으로 알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돈 많은 교회,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이 많
은 교회인 것을 자랑이 아니라 차라리 부끄럽고 부담스러워할 줄 아는 초대교
회로 돌아가자.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 큰 부자가 될 수 없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세상
에서 곧이곧대로 진리를 말하면 출세할 수 없다는 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반면에 부자가 되고 성공한다는 것은 세상과의 타협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싸잡아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 참으로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우리
는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 점을 분명히 가
르쳐 일깨워야 한다.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음과 세상에 부러워할 만 한 아
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속성부터 거스르자
목회에 성공이 있다고 누가 가르쳤는가? 많은 교인들을 모으고 커다란 교회당
을 지으며 교회의 재정이 많아 부자 교회가 되면 그것이 성공인가? 좋은 집
에 살고 좋은 자동차 타고 다니는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님을 일깨워야 한다. 
세상에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고, 권력이나 부 그리고 명예를 가지는 
것이 도리어 부끄러움임을 잘 깨달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더러운 배설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을 많이 얻
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도리어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초대교회 성도
들은 그런 것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그런 자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에
게는 그런 것들과는 도저히 비견될 수 없는 엄청난 천국의 소망이 있었기 때
문이다.

이러한 일깨움은 교회의 교사(목사)가 될 일군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시대 다수의 
신학생들이 목회 성공을 꿈꾸는 것은 심
히 안타까운 일이다. 부름을 받아 말씀을 증거하는 교회의 교사가 될 신학생
들은 자기를 온전히 포기하는 신앙적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마16:24). 

누구든 자기 십자가 짊어져야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을 포기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참된 고
백이냐 아니면 입술의 말이냐 하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자기를 포기
했다면 세상에서의 성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뜻
에 따라 사는 날 동안 주님을 기다리며 순종하며 살 따름이다. 신학교수들이 
신학생들에게 그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른다. 지금 당장 아니면 오늘밤인지 알지 못
한다.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시각에 주님이 오실 것을 성경이 가르치
고 있다. 이 세상을 진정으로 포기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적 삶이 그리
워진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계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