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발하시는 하나님의 우연(1)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하나님은 우회하시는 것 같아도 반드시 선과 악 갚으시는 분”
개미는 일개미, 수캐미, 여왕개미, 병정개미 등으로 나뉘어 각자 맡은 일만을 열심히 한다. 그런데 개미집은 매우 세분화되어 음식과 알과 부화한 애벌레를 각각 두는 방, 이들을 먹일 버섯을 기르는 방, 냉난방까지 되어 있는 방이 있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를 살펴보면 도저히 이러한 사회구조와 집을 지을 수 있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들은 이런 정교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이처럼 각 구성 요소로 볼 때는 생각지 못했던 기능이나 현상이 전체적인 구조를 통해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을 창발성(emergence)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특성을 이용하여 갑자기 생명이 튀어나왔고, 이것이 어떤 시점에 이르면 갑자기 진화하여 고등동물이 되었고, 또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의 발전도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창발성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옴을 확신한다. 개미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사회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각 구성 요소에 있어서는 별 볼일 없지만, 그 전체로 어떤 기능과 방향성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동시키시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와 연합하여 아람과 전쟁을 벌인다. 아람왕은 이 전쟁의 주동자가 아합인 것을 알고 지휘관 32인에게 먼저 그를 죽이라고 말했다. 아합은 아람왕이 이런 명령을 내릴 것을 짐작하고 왕복을 벗어버리고 일반군인처럼 변장을 했다.
그래서 아람의 지휘관 32인은 왕복을 입은 자를 찾아 쫓아갔지만 그가 남유다의 여호사밧왕인 것을 알고는 포기했다. 아합은 이런 것을 보며 자기의 계략이 맞아 돌아감에 흐뭇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합은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았고, 전쟁이 너무 맹렬하여 제 때 치료를 못받아 피를 너무 많이 흘러 죽고 말았다.
부하들은 병거 바닥에 고인 피를 사마리아 못에 가져가 씻었고, 개들은 그 피를 핥았는데, 성경은 이것이 여호와의 하신 말씀대로 되었다고 말한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 그를 모략하고 죽인 후에 포도원을 빼앗았는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아합의 피도 핥을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이 예언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의해 그대로 집행된 것이다.
이 화살이 ‘우연히’ 날아온 것일까? 아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쏘는 화살 하나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우연히’라는 단어를 통하여 성경은 더 강하게 말할 뿐이다.
아합, 이세벨, 죽임을 당한 나봇, 유다 왕, 아람 왕, 그리고 세 나라의 많은 병사들, 이들 모두는 독립적으로 활동을 한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무시하지 않고 모두 내포하면서도 그들을 뛰어 넘어 창발적으로 일하신다.
우리 교회는 2003년에 교회당 건축을 했다. 그때 앞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6층은 너무 높다며 콘크리트 타설 때 실력행사를 하여 레미콘 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구청이 적법하게 허가한 건축공사를 막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4층으로 타협을 했다. 하지만 이 타협으로 우리 교회는 말 그대로 수억 손해를 봤고, 여러 계획이 망가졌고, 나 자신의 리더십도 흔들렸다. 실력행사를 하며 건축을 방해한 주민들이 미웠고 분노스러웠다.
이 힘듦을 나는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도 하며 이겨내려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미련과 분노와 불안이 얼마나 사람 몸을 망가뜨리는지 체험했다. 건축을 하다 목사님들이 아프고 죽기까지 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 중에 이것들을 이겨내는데,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며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롬 12장 말씀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무심코 날아가는 화살 하나를 통해 징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음을 가라앉히게 했다.
우리 교회의 건축이 옳다면 창발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눈에는 우회하시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반드시 선과 악을 갚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렇게 마음을 추슬러 나가니 주민들이 왜 방해하는지, 그분들의 마음은 어떠한지도 눈에 들어왔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도, 성경을 많이 보는 사람도, 교회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신앙이 좋겠지만,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푸는 사람이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고수이다. 사람이 행한 선과 악이 어디로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정확하게 나타날 것을 그대로 믿는 이들이 신앙이 좋은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욕심어린 목적과 혈기를 짐짓 경건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미화한 교회당 건축에는 목회자의 욕심과 성도들의 허영이 더 크게 자리 잡을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생각과 일을 맞추어 가는 자이다.
억울히 죽음을 당한 나봇의 가족들의 신앙의 승리는 무엇일까? 아마 그 일을 잊는 것일 것이다. 아합의 가족들이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최대의 복수는 상대방을 잊는 것이고 상대방이 그대로 살게 놔두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성향대로 살다가 무심코 날아오는 화살에 피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보지 못한 죄가 없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이 섭리에서 말하듯 하나님은 그 잘못들에 대해서도 우리들을 징계하시어 우리의 부패성을 알게 하시고 겸손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도 “내 원수는 남이 갚는다”는 격언으로 복수를 미루는데, 우리는 창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하여 더욱 잊어야 할 것이다. 정말 고수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