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긴 난초 황대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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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난초

황대연/ 한가족교회 목사

우리 집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이십여개가 있습니다.
제 기억에 돈을 주고 산 것은 거의 없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아무렇게나 길 한 켠에 나뒹굴던 것을 주워 온 것도 
있고, 건강이 불편한 성도가 이제는 더 이상 키울 수 없다며 꽃 좋아하는 사
모님 드린다고 몇 개 넘겨준 것도 있습니다.

대부분 화초를 좋아하는 아내가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투입하고 하면서 지
극 정성으로 살려낸 것들입니다.
아내는 잘 키워서 그중 잘 생긴 놈들은 교회에다가 가져다 놓기도 하고, 잘 
포장해서 카드와 함께 개업하는 성도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 베란다 한쪽에 있는 조그마한 동양란은 벌써 5년 이상을 잦은 
이사 속에도 소중히 우리 가족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녀석은 가끔씩 잊을 만하면 앙징맞은 꽃 봉우리를 터뜨리며 온 집안을 향
기로 가득하게 만들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줍니다.

이 동양란을 볼 때마다 문득 문득 P형제가 생각이 
납니다.
P형제는 개척초기, 누가 전도하지 않았음에도 지나다가 ‘한가족교회’ 이름이 
마음에 들어 와봤다며 그야말로 바람결에 날아든 민들레 홀씨 같은 사람이었
습니다.

그는 무슨 사고로 거의 몇 달을 식물인간처럼 살았고, 그 사이 그의 아내는 
하나있는 딸, ‘온누리’를 남겨 놓고 가출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딸 하나가 딸린 34살짜리 이혼남이었던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했는데, 무슨 기계를 파는 영업 
사원으로 전국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허로운 가슴으로 집에 돌아오다 ‘한가족교회’ 간판을 보고 
무작정 찾아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척교회 교인이라고 해야 10여명 남짓 
있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목사 안수를 받았음에도 뒤늦게 또 합동신학대학원에 들어가 공
부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괜찮은 데 헬라어, 히브리어로 연일 코피가 터
질 때였습니다.
한창 시험을 앞둔 어느 날, 젖은 목소리로 그가 전화를 해 왔습니다.

“목사님, 시간 있으시면…언제 얘기 좀 하시죠…”
“예, 지금 
급하신 일인가요?”
“아,아뇨… 교회에서 뵙죠.”

그 주일, 그는 볼품없이 생긴 조그만 난초 화분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사모님… 이거 꽃 피면 그래도 이쁩니다. 
제가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 이젠 잘 못 키울 것 같네요…”

그리고 그는 주일이면 출장이 겹쳐서 교회에서 자주 볼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누리’아빠가 상담을 청하는 전화를 다시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간이 있을 때는 내가 시간이 없었고, 내가 시간이 있을 때는 
그는 지방에 출장을 가고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맞질 않아 어그러지길 얼마를 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가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회사 야유회를 갔다가 보트가 뒤집혀서 익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흑산
도 출신이라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P형제의 장례를 마치고 저는 깊이 깊이 좌절했습니다.
알량한 공부한답시고 목사가 되어 가지고 성도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그
렇게 내게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했는데 상담도 못해준 것이 한꺼번에 죄책
감으로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결국 학교를 휴학을 했고, 새벽마다 
울었고, 낮
에는 방황했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든지, 아니면 목회 안하고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생각
하셨든지 그 와중에 교인들 몇 사람을 붙여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묻고 돌아와서도 산 자들은 밥을 먹듯, 나는 초췌한 모습으로 억지
로라도 설교를 해야 했고,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난초가 꽃이 피고 지기를 벌써 몇 번 하는 사이, 내 심령의 
아픔도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그가 남긴 난초에 또 꽃이 필 것입니다…
내 중심에 새로 피어난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