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나무 침대
박종훈 목사·전북노회
작년 겨울부터 계획했던 일이지만 여러 가지 바쁘고 날씨관계로 미루다가 이
제야 겨우 원목으로 이층 침대를 만들었다. 교회당 종탑공사를 하고 남겨진
원목을 자르고 다듬고 끌로 파고 불로 나무의 아름다운 결을 살리면서 뚝딱거
리며 여러 날을 거쳐 드디어 막내아들인 서진이의 전용 방(?)을 지원이 형이
자는 방에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서진이는 당당히 자기 방을 요구했다. 유난히도 뭘 만들기를 좋아
하며 혼잣말로 뭐라고 주고받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을 머금게
했다. 특히 테이프를 제일 많이 사용하여 온갖 작품을(?) 만들고서 자랑스레
보여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뒤처리를 하지 않아 앉은자리마다 어지럽힌 흔적으
로 인하여 꾸중을 듣자 자기 방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누나방에서 자다가 형이 맘에 들게 하면 형방에서 자기도 하고 때로
는 엄마 옆에서 자더니 어느 날에는 거실에서 혼자 자겠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형과 누나는
자기 방이 있는데 왜 내 방은 없냐며 항의하는 것이
다.
집을 지을 때 제한된 공간이라 당연히 아들들이 한 방을 사용할 것으로 계획
하고 지었지만 서진이로서는 자신만의 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층침대를 생각했던 것이다.
이왕이면 튼튼하고 실용적인 침대를 만들고자 가능한 못을 사용하기보다는 홈
을 파고 서로 짜맞추는 공법을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한 치만 틀려도 원하는 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기에 조금은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했다.
일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지금의 나의 사는 집보다도 적은 공간에서 삼남일녀와 양부모님 여섯 식구가
부대끼며 안방과 조그만 옆방 하나로 단란하게 살았었다.
물론 좁은 집이지만 감히 방 넓혀주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저 밥먹고
학교 다닌 것으로도 감사히 여기는 시절이었다.
조금 커서는 주로 나는 다른 집에서 잠을 자고 들어오는 형편이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흙담으로 된 헛간에다 동생들과 열심히 다락 비슷한 것
을 만들었다.
나무막대를 걸치고 자리를 깔고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고 눕기도
하며 처음으
로 내 손으로 만든 뿌듯함에 만족을 느꼈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모양을 발견
한 아버지로부터 철거명령과 함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사실 그때에
나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나 나 역시도 모르고 지나갔었다.
아버지로부터 자녀를 위해 손수 무엇을 만들어 받은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이
제 아버지가 되어 이처럼 자녀들을 위해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이 현실에 작
은 행복을 느꼈다.
다른 직업이나 또는 도시에서 목회했다면 이런 환경과 여유가 없으리라 본
다.
장차 이들이 자라서 한 가정의 부모가 되었을 때 나의 이 모습을 기억하고 좋
은 영향이 되었으면 한다.
둘이 누워도 될 만한 넓은 나무침대에 두꺼운 송판을 마루처럼 깔고 책상과
책꽂이를 겸하여 만들고 보니 훌륭한 공부방이 되었다. 방에서는 일어서야 밖
의 정원이 보였지만 이층나무 침대는 누워있어도 한 눈에 보이는 밖의 풍경
에 스르르 눈이 감겨온다.
올 여름에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에 시원한 나무침대에 잠깐의 낮잠(午寢)
을 즐기는 시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