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
변이주 목사/ 전북노회
뛰어난 검술과 날쌘 몸놀림으로 탐관오리의 집을 습격하여 약탈한 재물을 가
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의적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를 비호하여 숨겨주기도 하며 감싸주었기에 오랫동안 잡히지 않고 탐관오리
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도적이 백성들에게 나눠준 것은 탈취한 것의 극히 일부
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적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제 잇속을 크
게 챙겼던 것입니다.
사탄이 성도를 속이는 것도 마찬가지 수법입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유익을 주
는척 하여 성도를 미혹한 후 미끼에 걸려들면 제 놈의 노예로 삼아버리고 맙
니다. 적은 미끼로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놈, 그 놈이 바로 사탄인 것입니
다. 사탄은 오늘날 <실용주의>라는 미끼를 던져서 아주 쉽게 많은 것을 낚아
채고 있습니다.
종교와 도덕성을 포기한 죤·듀이는 자기와 타인과의 관계, 자기와 피조물과
의 관계에서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실용주의’라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가 옳습니다. 즉 ‘실용적이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 ‘유익하기
때문에 실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 중에도 이 실용주의의 미끼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는 이
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흥’에 노이로제
상태가 돼버린 일부 목회자들 중에는 교회에 활력소가 된다 싶으면 거기에 어
떤 함정이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미끼를 덥썩 물어버리는 경우
가 적지 않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교회만 부
흥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단들이 즐겨하는 일들도 서슴없이 목회현장으
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단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봅니다. 이단이란 글자 그대로 異端― 즉 ‘끝이
다른 것’ 혹은 ‘끝에 가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이단이란 한참 지난 다음에야 본색을 나타내기 때문에 ‘속았구나!’하
고 한탄할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뒤인 것입니다. 의적을 가
장한 도적, 천사를 가
장한 악마, – 이것이 이단의 정체라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단에 속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한 번 와서 들어보고 판단하라’는 말로
부추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아느냐’ 하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어리석은 행동을 질책하는 뜻이 있는가 하면 지혜롭지 못한 행
동을 할 경우 어떤 모양으로든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된다는 뜻도 포함하
고 있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냄새로 알아봐야지 일단 만져보거나 먹
어본 뒤에는 그것이 똥이든 된장이든 뒤처리에 한동안 애를 먹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얼마 전에 분수를 모르는 어떤 목회자가 수천 만원의 돈을 길거리에 뿌려 물
의를 빚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한다’
는 것이었고, 방송 인터뷰에서는 “이게 설교다. 돈을 움켜쥐지 말고 뿌리
자. 우리는 뿌리고 나누는 삶을 살자”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이런
말 같지 않은 말에 공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거지에게 동냥을 줄 때에도 돈을 뿌려주지는 않습니다. 하물
며 그리스도의 사
랑을 나누겠다는 사람이, 그것도 성직자가 돈을 뿌린다는 것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주장하는 내용에 이단적인 요소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단 못지 않게 나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교육을 받고 그 내용을 목회에 적용한다는 건 아무리 너그럽
게 봐준다 해도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