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이 되지 말고, 목회자가 되십시오! 고린도전서 4:1-5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목회자의 길은 번영의 양지와 병립할 수 없어”
황우석 박사는 한때 온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영웅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6-7년 전, 황우석 박사가 어떻게 온 나라를 요동치게 만들고 참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몰락을 했었는지는 이 나라 국민 모두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수년이 흐른 얼마 전 한 기자가 그를 만나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중에 몇 대목은 제게도 두려운 경고의 큰 함성처럼 들리며 한동안 제 가슴속에서 계속 메아리쳤습니다. 그가 그 치욕적인 값을 치르고 깨달았다는 그 사실은 바로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라는 생각 때문에 그의 말들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 돌이켜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과학자는 결코 양지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게 (과학자의) 숙명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 양지란 뭐죠?
“사회적 명예, 안락함, (한마디로)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거죠. 그것은 과학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무 생각이 없었죠. 천지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둥둥 떠다녔던 겁니다. 철이 없었던 거죠… (당시) 나는 … 건달이나 다름 없었어요. 과학자가 아니었어요.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나오는 순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 실험실 밖 세상은 좋던가요?
“터널(실험실) 안에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배고팠어요. 그런데 그게 진정한 행복이란 걸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찾았습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달콤한 햇빛 근처에는 안 갑니다. 데어요. 화상을 입습니다. 따뜻한 곳에는 항상 불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1도 화상이냐, 저처럼 3도 중화상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지….”
“당시 나는 건달이나 다름없었어요. 과학자가 아니었어요”라는 황우석 박사의 말은 지금도 저에게는 이렇게 바뀌어 되뇌어집니다. “나는 건달이나 다름없었어요. 목회자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과 기도의 고독한 터널 안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며 그 결과를 들고 강단을 마주하고 있는 교인들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터널의 현장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고, 건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터널 안에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배고팠어요. 그런데 그게 진정한 행복이란 걸 몰랐어요.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달콤한 햇빛 근처에는 안 갑니다!” 수년 동안의 치욕과 몰락의 구렁텅이를 허우적거리며 이제야 깨달았다는 이 과학자의 교훈이 단순히 그 사람 개인이나, 과학자의 분야에만 해당되는 남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 목회자들도 본질이 같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너지를 너무 밖에 많이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목회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느라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너무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디, 건달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황 박사의 말대로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찾아, 그 터널 속으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목회자의 참 행복이 있습니다.
목회자 한 사람은 단순히 사람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 하나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 지경으로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별로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책임은 교인들보다는 훨씬 더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양지를 찾아서 터널을 떠나는 우리 목회자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리지도 말고, 부와 번영의 양지를 넘보지도 말고, 주님께서 부르시고, 이 사회와 우리의 교인들이 기대하는 터널 안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과 정직과 진실과 공의와 고독의 터널 안에 있어야 합니다.
황 박사의 말처럼, 춥고 어둡고 배고파도 그 터널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고 우리의 가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