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일천번제’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한국교회는 ‘일천번제’라고 하는 독특한 연속헌금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
다. 예배마다 일정 금액을 헌금하되 일천번이 되기까지 계속하는 일종의 작정
헌금입니다.
이 헌금 형태에 대해서는 이미 본지에서 두세 차례 언급이 된 줄 압니다.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 보는 것이 혹 어떤 분들에게는 도움
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다시 다뤄 보고자 합니다.
‘일천번제’가 성경적인 것으로써 오늘날 드리는 헌금의 전형이 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분들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웁니
다. ‘솔로몬이 했으니 우리도 한다’라는 식의 적용은 우선 그 단순성 때문에
호소력이 있어 보입니다.
나아가서 이 주장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전무
후무한 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매력이 있어 보입니다. 누가 이런
지혜를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약의 한 인물의
행동을 신약시대에 교회적으로 일반화하거나 제
도화하는 것은 해석적으로 그 타당성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일천번
제 자체는 구약의 어떤 제사법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먼저 개역성경의 한글번역 ‘일천번제’가 ‘一千番祭’인지 ‘一千燔祭’인지
혼동을 주고 있어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국한문혼용 개역성경은 후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세히 보면 ‘일천’과 ‘번제’를 띄어서 정확하게 표기
되어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 성경 본문은 ‘일 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일 천 마리의 번제
물’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개역개정은 ‘일천 번제’라고 띄어 쓰고, 표준새
번역은 ‘번제물은, 일 천 마리가 넘었을 것이다’라고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
다.
솔로몬의 예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졌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 제사에 얼마나 많은 희생제물을 드렸을까요? 한 번의 제사에 한 제물
씩, 도합 일 천 번의 예배에 일 천 마리의 번제물을 드렸을까요?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예배가 개인
의 사적인 예배가 아니라 지도자의 국가적 행사로 드려진 예배임을 감안할
때 이런 해석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설령 솔로몬이 한 예배에 한 마리의 번제물을 천 번에 걸쳐 드렸다고 하더
라도 솔로몬의 예배가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
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이 제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스라
엘 사람에게도 ‘규범’으로나 ‘모델’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솔로
몬 자신도 이런 예배를 늘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이런 예배는 매
우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 이 제사형태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에서 하
나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받
아야 할 것은 솔로몬이 드린 번제물의 수효나 번제의 회수가 아니라 솔로몬
이 보인 예배의 태도와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신이 먼저 아름다운 헌금생활을 감당해야 할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가 드리는 다양한 형태의 헌신과 헌금을 귀히 여겨야 함은
물론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을 지
극히 사랑하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것이 새벽기
도이든 수요 기도회이든 간에,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자
원해서 헌금을 드린다면 이것은 솔로몬의 예배정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누
가 이런 헌금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소위 일천번제 헌금이 어떤 기복적인 ‘소원성취’를 보장하는 기계
적인 수단으로 드려지거나,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억지로 드려진다면, 이것이
야말로 솔로몬이 드린 예배의 정신에서 매우 먼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
다.
분명한 것은 소위 일천번제 헌금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헌금의 규범으로
제시되거나 강요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아가서 헌금의 형식과 숫자와 액수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즐겨 헌금하는 자세와 더불어 우리의 몸 전체를 거룩
한 산 제사로 드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