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사적 영향_김병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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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사적 영향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칼빈주의에 근거한 교회의 표준 문서로 자리잡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된 목적은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표준적이며 공식적인 교리와 관련된 문서들을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개혁파 교리와 예배 표준 제시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집 자체가 이미 장로교회 제도를 도입했던 스코틀랜드 의회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만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은 뚜렷한 개혁파 교리와 예배의 표준들과 아울러 장로교회 정치제도를 반영하였습니다. 
1646년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승인을 의회에 요청하였으나 에라스투주의를 지지했던 의회는 승인을 거부한 채 신앙고백서의 각 조항별로 성경 전거를 만들어 제시하도록 총회에 돌려보내며 이의 비준을 미루었습니다. 
이와 달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아무런 수정이 없이 신앙고백서를 1647년에 신앙의 표준문서로 즉각 받아들였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1648년에 가서야 일부 항목을 제외한 채 부분적으로만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회중주의자였던 크롬웰이 1658년에 죽은 후 1661년에 왕위에 오른 찰즈 2세는 잉글랜드에 주교제도를 복구하였고 신앙고백서를 비준한 의회의 1648년 결정을 무효화하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는 카톨릭 신자이었으며 절대 왕정을 추구하였던 까닭에 잉글랜드 의회는 이에 대한 반발과 또 카톨릭으로의 복귀에 대한 염려 등으로 인하여 개신교 신자였던 오렌지 윌리암 공의 힘을 빌어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윌리엄 3세와 메어리 2세를 함께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690년에 다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회중교회자들과 심지어는 침례주의자들까지도 받아들였을 만큼 많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648년에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회중주의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정치에 관련한 부분을 제외하고 그대로 인준하여 자신들의 신앙문서로 받는 ‘켐브리지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1658년에 회중주의자들은 런던에 있는 사보이 궁전에 모여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장로교 교회정치에 관한 부분을 수정하여 노회로부터 개교회가 독립적인 권한을 갖는다는(이 이유 때문에 이들은 ‘독립파’라고 일컬어졌음) 회중주의 교회론을 담은 ‘사보이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수정된 부분과 새로이 추가된 부분을 제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체를 그대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보이 선언문’이 만들어진 후, 회중주의자들은 1680년에 보스턴에 모여서 이것을 ‘캠브리지 강령’과 더불어 자신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으로 공인하였습니다. 
침례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1946년보다 2년 앞서서 자신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서를 1644년에 만들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침례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며 보편속죄를 주장하는 ‘일반침례주의자’들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를 따르며 제한속죄를 고백하는 ‘특별침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칼빈주의 침례주의자들 혹은 개혁파 침례주의자들로 불리기도 합니다. 
1644년에 만들어진 침례주의자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서는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널리 사용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후에 많은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은 교회정치와 유아세례에 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사용하였습니다. 
1677년에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사보이 선언문을 참조하여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으나 박해로 인하여 이것을 공식화하지 못하다가 1689년에 종교에 대한 관용정책이 시행이 되고 나서 ‘1689 침례주의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으로 공식화하였습니다. 
미국의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은 이것에 시편 찬송과 안수에 관한 부분을 덧붙여 1742년에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으로 채택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약간의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개혁파 침례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706년에 첫 노회를 구성하고, 1716년에 첫 총회를 구성하였던 미국 장로교회는 1729년에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모든 목사가 따라야할 표준 교리 문서로 채택을 하였습니다. 
그후 미국 장로교회는 신앙고백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습니다. 1789년에 미국 장로교회는 교회와 관련한 정부의 의무와 관련한 부분을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삭제하고,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규정한 부분을 삭체하는 등의 수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03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칼빈주의를 완화하는 기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였습니다. 
다소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을 취하였던 미합중국 장로교회에 반발하는 미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1789년의 수정판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신앙의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단의 표준문서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1904년에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12개 신조를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초대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또한 표준신앙문서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 전통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주요 장로 교단들은 각각 합동 측은 1963년에, 통합 측은 1968년에, 그리고 고려 측은 1972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단의 표준적인 신앙문서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전 세계에 있는 장로교회들에 의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신앙표준문서로 널리 채택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표준문서로 채택돼

 

신앙고백서가 갖는 교회사적 영향은 실로 세계적이며, 지금까지 여전히 고전적인 개혁파 교회의 신앙문서로 귀한 가치를 인정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