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나로호 실패와 한국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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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호 실패와 한국교회의 과제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복음은 모든 역사의 목적과 완성, 열쇠와 답으로 주어진 것”

 

나로호 실패 사건이나 월드컵 축구경기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성 자체의 전체적인 성격을 관찰하게 된다. 그렇지만 2차원 화면 밖에 한 점으로 있으면서 2차원 화면에 움직이는 장면들을 보는 자로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것이다.

 

물론 컴퓨터 화면의 경우의 수를 전부 동원하여 한 점을 중심으로 의식이 그 변화를 느끼기 전에 화면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는 방식이든, 우리의 좌뇌와 우뇌의 차이를 이용하여 입체현상을 재현하는 방식이든 인간이 기술적으로 3D 현상을 구현하는 방식은 우리가 2차원 화면 밖에 한 점으로 있으면서 볼 수 있는 상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좌표방식에서 표상이 되는 대로 기존의 차원에 직교관계에 있는 다른 차원을 열 때 거기에 차원이 하나 더 더해지는 것으로 그것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각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보들을 모아 동시에 다양한 뇌의 피질에서 일어나는 뇌의 상영방식에 의하면 외부정보들로부터 오는 경우의 모든 수들을 한꺼번에 매 순간 변하게 하는 점들의 움직임(의식의 커서)이 있다는 것일 뿐, 그 점 자체가 기존 차원에 다른 차원으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그 점 자체가 어떤 차원들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세기의 문제이었던 ‘포앙카레 추측’(Poincare Conjecture)에 대한 답을 증명한 것으로 인정을 받아 대표적 명예의 상(Fields Medal) 받기를 거절하면서 “그 증명이 정확하다면 다른 인정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소련 유대인 수학자 그리샤(혹은 그리고리) 페렐만(Grisha Perelman)의 경우, 시간개념은 통계 텐서(metric tensor)와 같은 개념으로 계산되었다. 

그런 시간 개념의 도입에 의해서, 열의 확장방식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리치 흐름’(Ricci flow)은 궁극적 어느 차원들에서도 어느 시점에서 무한한 시간으로 향하여 갈 때 항상 궁극적으로 ‘특이점들’(singularities)로 몰락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4차원 공간 안에서의 3차원적 구들(3-dimensional spheres)의 경우 그런 특이점들이 수술될 수 있어 영원히 연결되어 있는 식으로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세계를 그는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결론이 자유공간 혹은 자유의지에 관한 중요한 수학적 표상을 밝혀내는 단서들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물질의 가장 작은 정보 단위가 어떻게 가장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자로 형성될 수 있었으며, 퀘크들(quarks)과 글루온들(gluons)이 이루는 자유공간이 어떻게 성립되었고 그런 기하학과 에너지 자체와의 관계 상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 절대세계의 레벨들과 각 레벨 안에 있는 차원들이 얼마나 다양한 지를 증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데카르트 좌표개념과 같은 차원들에 대한 표상이 자기력과 전기력 사이 직교관계를 통해서 잘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직 그런 힘들은 동시에 지금의 공간을 가득 채워지는 방식이기 때문에 두 차원들의 예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지금은 전자가 자기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빠른 광자가 자기력의 원천이란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런 힘들의 원형이 아주 애매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인류의 어려운 과제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20세기에 와서 창세기 23장과 같은 기록들이 그 당시 실제적으로 “직접화법으로 기록된 대화체 판매문서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모세시대에서도 증명할 수 없었던 너무나 우연히 땅 속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토판들로부터 지금 밝혀진 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서 큰 진보 중 하나이다. 

서지학에 있어서 인류가 그렇게 많이 실패하였고 사도들 이후 3세기까지 어떤 교부들도 알려주지 않았던 1세기의 바울 서신들의 모음집에 대한 증거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황제들 시대의 많은 파피루스들의 필체들에 의해서만 확인될 수 있는 아주 예외적인 한 필체에 의해서 증명된 사건도 인류가 그 진보를 보인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이다. 

현재로서 러시아 기술에 너무 의존함으로 생긴 나로호 실패사건은 한국의 과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주제이지만, 한국사람으로서 그것에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오히려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천천히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는 분야들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세계에서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과제들을 풀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호기심과 노력 및 희생이 필요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류 미래 에너지 분야의 개척에 있어서 서방세계가 19세기 초 이후에 더 이상 진척이 없는 전기분해를 통하지 않고 촉매도 사용함이 없이 식물과 같이 직접 물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한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면, 그런 전기 생산방식이 미래 인류문명역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총체적이고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 영역에 있어서도 이제 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곳은 없다. 기독교 정체성에 있어서 실패한 서방의 모든 연구들은 이제 괄호 안에 넣고 진정 기독교 정체성에 공헌한 내용들만을 계승하여 미래 기독교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현대시대로부터 공헌할 수 있는 내용들을 찾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병이어 이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일시적인 이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연은 기독교인들에게 항존적인 하나님의 이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율법은 그런 항존적인 이적들이나 일시적인 이적들로 푸는 하나님의 원대한 역사적 질서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복음은 그런 형식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목적과 완성, 열쇠와 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인류 앞에 가져야 할 과제들처럼, 그런 내용들을 좁게 북한문제나 한국사회의 문제들에 얽매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류 역사들의 진보 내용들에 의해서 세계 앞에 엄밀하고 세밀하게 풀어내야 하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