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1>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간략한 역사적 배경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담임,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의해 성립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호부터 시작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겨 있는 개혁신학의 사상들에 대한 해설을 연재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칼빈의 사상 계승한 웨신문서들
2009년 올해가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칼빈이 탄생한지 500주년이 됨을 기념하는 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를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신앙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이들과 같은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이 영적 생명력이 없는 합리주의와 작정 교리의 연역적 적용에 치우쳤으며, 칼빈의 신학적 통찰과 성경적 순수성에서 떠났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주요 신학 사상들을 실체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각 장의 해설을 통해서 확인이 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리게 된 역사적 배경을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찰즈 1세가 통치하던 기간(1626-1649년)에 열렸습니다. 찰즈 1세는 영국 교회를 로마 카톨릭에 친화적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주장을 펴며 주교제도를 통해 교회에 대한 왕권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찰즈 1세의 정책은 잉글랜드 교회에서 조차도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찰즈 1세는 장로교회였던 스코틀랜드 교회로 하여금 잉글랜드 교회와 같은 예배 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판 ‘공동기도서’를 만들어 그것을 시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1637년 7월 에딘버러에서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638년 12월에 글래스고우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공동기도서’의 도입을 거부하며 주교제도를 폐지하고 장로교회에 어긋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찰즈 1세는 스코틀랜드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나 준비의 부족과 잉글랜드 의회의 비협조로 말미암아 오히려 스코틀랜드 군대에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군대를 가리켜 언약파 군대라고 합니다.
찰즈 1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전비 마련을 위해 징세를 하려고 하였지만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탓에 의회를 해산하고 스코틀랜드 언약파 군대와 다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이제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에로 진격해 왔으며, 이에 찰즈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의 요구를 받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스코들랜드 군대의 요구는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의회는 앞서 해산된 단기의회와 구별하여 장기의회라고 일컬어집니다.
장기의회는 왕과 대립을 한 끝에 1642년에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약 7년간에 걸친 내전을 치룹니다. 전세가 불리하였던 의회파는 전쟁 초기에 스코틀랜드 언약파와 동맹을 맺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1643년 9월에 맺은 이 동맹을 가리켜 ‘엄숙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라고 일컫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이 동맹을 통해서 잉글랜드 의회가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와 같은 장로교회로 개혁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의회파는 후에 회중주의자 크롬웰의 지휘 아래 1649년에 찰즈 1세를 처형함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시민 전쟁의 와중에 잉글랜드 의회는 의회에 대한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이를 위한 교직자들의 총회를 소집할 것을 찰즈 1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왕이 이를 다섯 번에 이르기까지 거부를 하자 왕의 재가를 받지 않은 채 상원의 동의를 얻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7세 채플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총대의 수는 모두 151명으로 이중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그리고 121명의 주교가 아닌 성직자들이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5명의 목사들과 3명의 장로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의회에 의하여 과제를 부여받은 총회는 첫 회의가 열렸던 1643년 7월 1일부터 마지막 회의가 있었던 1649년 2월 22일까지 무려 5년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1,163번에 이르는 회의들을 가졌습니다.
5년 6개월 동안에 걸쳐 이뤄져
그 결과 ‘예배모범'(1645년), ‘장로회 교회 정치규범'(1645년), ‘신앙고백서'(1646년), 그리고 ‘대소요리문답'(1648년) 등의 네 가지 신앙 표준문서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