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요리문답을 펼쳐야 할 때
< 이윤호 장로, 선교비평 발행인 >
“신앙고백은 신앙의 정체성 정립하는 교회의 교과서”
127문>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이러
한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
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
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신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해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128문>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칩니까?
답>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이러
한 간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진 분으로
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며
또한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
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구하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129문> “아멘”이라는 이 짧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아멘”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런 것들을 소
원하는 심정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으십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의회(議會)가 열렸습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려했
던 개혁가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앙 공식적으로 인정돼
이번의 개혁운동은 그저 유행처럼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이 아님이 명백해졌
을 때 제국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했습니다. 소위 신교도(新敎徒)들이라
일컬어지는 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단으로 규정하여 근
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이들의 신앙을 인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톨릭
과 루터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가 허용된 것입니다. 단, 선택권자
는 영지의 통치자였습니다. 통치자의 종교가 곧 모두의 종교가 된다는 발상
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합니다. 그렇지만 봉건적 전통이 잔존하던 시
절, 통치자에게 그러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
다.
이런 생각을 해봄직 합니다. 일부지역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교도
가 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신교의 본질적 내용이 아니
라 통치자의 종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
교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
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명목상의 신교도들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교 개혁가들이 요리문답을 작성하고 가르치는데 그토록 열심
이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저런 외적 상황에 영향을 받거
나 신선한 매력에 이끌려 신교도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 의미를 올바로 알
지 못하여 은혜의 풍성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
다.
그 때를 즈음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었을 때, 이를 통해 신실
한 자들은
가톨릭과도 루터파와도 구별되는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을 발견해
나갔을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마음이 적지 않게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요
리문답은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몸에 배인 종교적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 문항 한 문항 의미를 짚어가
는 동안, 그들은 신앙을 재발견해 나가는 참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듯 요리문답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의 전투하는 삶과 주님
을 인정하는 삶에 대한 교훈을 받았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얻
었을 것입니다. 암흑 같은 세상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확신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위로 말입니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인 사고와 로마교회의 전통적 관행에서 벗어나 오직
성경적 관점으로 죄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이제부터 무엇을 상대로 어떻게
전투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 자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주의적인 관점
에서 벗어나 만유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직 그의 선하신 뜻에 따
라 세상을 다스리는 섭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
질 수 있는 명백한 이유를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명
목상 장로교인일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집 가까이에 있던 교회가
마침 장로교회였기 때문에, 교회로 이끌어준 친구나 부모님이 장로교회에 다
니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교회가 장로교회이기 때
문에 개혁주의 본연의 정체성을 모른 채 장로교회의 교인으로 지내오고 있다
면 말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교회는 요리문답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명목
상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성도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개혁되는 교
회, 개혁되는 성도가 되려면 말입니다. 지난 5년동안 에세이 하이델베르크
를 애독해 주신 독자제위께 감사를 드립니다.
실제로 개혁되는 교회 세워나가야
* 그동안 <에세이 하이델베르크>를 통해 신앙의 기본을 세우고 이 땅의 그리
스도인으로 산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주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위로와
함께 천국 백성의 정체성을 배양할 수 있도록 원고를 써주신 필자에게 심심
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