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화의 수레바퀴 밑에서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성도들의 삶은 자기 의를 뿌리 뽑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어”
교회 앞 화단에 벌써 개나리가 피고 가끔 보는 들고양이가 그 밑에서 평화로운 잠을 청하고 있다. 그 녀석이 깰까봐 얼른 피해주었다. 그래도 우리 교회 마당이 좋은가보다. 이렇게 들녘에는 봄이 왔건만 세상의 여러 정황은 아직도 겨울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사역을 할 때마다 구원의 감격과 주님을 사랑하는 진심을 기울인 헌신에도 불구하고 신앙현실은 좀처럼 만족스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거룩과 성결을 원하나 승리보다 실패가 더 많고, 헌신과 충성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관심이 없으신 듯 만족할만한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구원의 감격 이후에 성장이 빠르고 믿음도 쑥쑥 크고 도덕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한 번 고백한 것으로 신앙의 흔들림이 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참 부러웠다. 난 왜 저런 확신이 없을까? 그러나 백 번을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런 길도 있으면 이런 길도 있다’는 목회적 안목으로 교회와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구원파적 구원관이 많았다. 그러한 신앙관은 점진적 성화에 따르는 시행착오나 실수들을 용납하지 않고 구원자체의 실패로 정죄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논리는 보편적이지가 않다. 그들은 회심하기만 하면 마치 구원이 완성되는 것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 달 가지 못한다. 도덕적, 신앙적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예배시간도 회심기도를 해야 예배를 드린 것 같고 평생 죽을죄만 지었다고 매주 고백한다. 그것이 좋은 의미도 있지만 어느덧 습관이 되고 체념이 되었지 그렇게 회개기도를 했는데도 사람이 더 나아지지를 않는다.
이런 식의 전통은 사실 쉬워 보이는데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다보니 신앙인들이 이중적이 되고 말았다.
명분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가 간증을 해도 죄 지은 이야기가 전부다. 회개 후에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신앙고백은 별로 없다. 믿은 다음에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심보다는 은혜가 앞서야 한다는 고백을 해야 한다. 다윗왕권의 영원함이 그의 실력이 아니라 메시야의 영원한 영원성에 근거했듯이 우리는 진심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선됨을 확인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가 시작이 아니고 누구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열강들이 앞서가서 식민지를 삼은 것 같이 우리도 이제 지지 말고 빨리 가서 부와 권력을 누리자는 식의 사고가 교회와 사회에 일반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 생각 속에는 잘한다, 못한다, 옳았다, 틀렸다만 있지 풍성함과 다양함이 없게 된다.
벽돌만 쌓았지 공간이 없는 것이다. 믿음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고 사람이 여유나 숨 쉴 틈이 없다.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문화가 없다. 인생과 시가 없다. 삶에 멋과 향기가 없다.
아파 죽겠다는 사람 앞에 ‘그건 말이야!’ 하고 설명하고 자꾸 강요만 한다. 이상하게 우리는 누구에게 배웠는지 말을 다 얄밉게 한다. 말을 너무 똑 소리 나게 한다.
칼빈주의! 합신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속 깊은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좀 하려고 하면 “됐거든!”이다. 그리고는 교단 행사나 중요하게 있어야할 자리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공부! 오직 믿음! 이다.
그런데 여기가 수상하다. 제대로 배웠으면 이럴 수가 없는 건데 왜 그럴까?
우리들이 물량주의 노예가 된 것이 문제이다. 물론 돈이 다가 아닌 줄도 안다. 요즘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일 시킬까봐 ‘아멘’도 잘 하지 않는다. 공통적인 분위기다.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한다. 주말이 되면 놀러가기 바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전부 국가보고만 책임지라고 한다.
언제나 우리는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고 가진 자를 탓 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분별과 책임, 절제가 중요하다. 이것은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원망과 불평하는 습관만 갖는다. 언제나 성공 다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크면 전부가 아니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누가 틀리고 다르면 ‘우린 그런 거 안 해!’만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욕을 먹는데서 도망가려고만 한다. 같이 욕을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설령 누가 잘못하면 철없는 기간인줄 알고 들어줘야 한다. 우리 각자가 어느 정도 일을 하고 인생을 살았으면 모든 것을 놓아주고 그러면서 짐도 져주고 때로는 욕도 함께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차별화만 시도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누가 더 잘 참고, 누가 더 양보하느냐의 싸움을 하지 못했다. 믿음을 갖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맡겼더니 죽을 것만 같은 것이어야 한다.
교인들의 사회생활을 보면 아슬아슬한 환경이 많다. 그런 현장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더라’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게만 해달라고 기도한다. 오해받지 않게 해달라고만 한다. 자책할 것이 없게만 해달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안전한 것이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일 새롭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인 것이다. 신학과 교리, 제도, 각오만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에도 죄는 들어올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진실로 응답하시며, 신앙의 승리를 현실로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 승리는 대부분 성도들의 기대와 달리 사건적이고 결과적이기 보다 내면적이고 원리적이다. 즉 자기 의를 뿌리 뽑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고 박영선 목사는 지적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은혜로 붙잡고 계셔서 거룩한 성화의 수레바퀴 밑에서 오히려 도망가지 못하며 사는 인생이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를 내 의지, 내 소원에 맡기지 말고 내어놓으라는 말씀 일 것이다. 어느 부분도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은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정황은 모두 도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주님 뜻대로 저를 쓰십시오!’가 나올 때 까지 우리를 꺾으신다는 것에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서 거룩한 비명이 나올지라도 묵묵히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이 우리가 소원하는 것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