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눈과 한국교회 현실
<최에스더 사모, 남서울평촌교회>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성취될 것”
주님 뵈옵기 너무나 죄송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던가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지금 이 곳에서는 주님께 예배드리고, 주님께 부탁드리고, 주님의 응답하심을 기대하기가 너무나도 민망하고 죄송하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와달라고, 지켜달라고, 부어달라고, 함께 해 달라고 그렇게도 술술 기도했건만 이제는 정말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차라리 이교도의 급성장을 경계하고, 이단의 미혹을 주의하던 때가 좋았다. 주님 앞에 자신 있게 매어 달릴 수 있지 않았던가.
주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셔야 하고 꼭 함께 해주셔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붙들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그 때가 얼마나 행복한 때였던가!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소문들은 뭐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싶게 만드는 소문들이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한국 개신교 목사들의 추태. 나처럼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들 건사하고 남편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녀자에게도 들리는 소문이 이 정도라면 불꽃같은 눈으로 이 모든 세상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건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참 슬프다.
그 목사들의 한 때, 정말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는 것만 같았던 그런 때가 있었건만 그런 시간들을, 그 때의 모습들을 우리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왜 저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것이 어디 내노라 하는 교회만의 이야기라면 사람의 욕심이 끼여들 여지가 너무나도 많게 풍요로운 교회만의 이야기라면 아직 희망은 있었겠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여호와의 진노가 그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 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렘 23:20).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렘 23:36 중).
아이들과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목사의 아내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밑줄을 그어 놓은 말씀들이다. 예레미야서 전체가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플롯이 잘 짜여진 한 편의 영화나 소설처럼 감동이었지만 그 중에 백미는 마지막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
지금 조국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바벨론을 향한 예언의 말씀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모두 기록한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바벨론에 가거든 여기에 적힌 말씀을 다 읽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시킨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외치고 그 기록한 책을 유프라테스 강속에 던지며 바벨론의 멸망을 다시 한번 외치게 한다.
‘스라야’라고 하는 이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거대한 바벨론 제국의 찬란한 영광과 위용을 드러내는 도시가 보이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서서 그 누구도 듣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그 분의 뜻을 선포하고 강으로 그 책을 던져 넣으면서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바위로 계란을 수 차례 던지고 난 다음의 기분이었을까. 이 사람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믿음과는 상관없이, 누가 듣고 있었는지, 아무도 안 들었는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졌었다.
지금도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성취되고 있다. 내 눈에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는가 하는 것도 중요치 않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변함 없이 말씀대로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래, 이 슬프고 두려운 마음을 내버리고 말씀으로 가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