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의 이야기
김영자 사모_채석포교회
“신앙생활 덕분에 무당 기업 대물려 주지 않게 돼”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고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금어기가 다가오기 전에 고기 잡는 일과 그물 손질로 손놀림이 빨라지고
밭에서도 육 쪽 마늘을 수확하느라고 바빴습니다.
신내림 대신 교회 선택한 집사님
그렇지만 그늘진 벚나무 아래 긴 탁자와 의자로 식탁을 준비하고 드럼통으로 만든 화
덕 위의 대리석 돌 판에서는 삼겹살 구워지는 냄새가 성도들을 모아들게 했습니다. 안
수 집사님 부부가 고기를 사오시고 다른 분은 텃밭에서 상추와 고추 그리고 들깻잎을
따왔습니다.
서로가 바빠서 예배 시간에 눈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는 그리움이 부족했나 봅니다. 눈으
로 펼쳐진 그림들도 우리들을 즐겁게 했으며 입도 즐겁고 마음까지 풍성한 저녁 시간이
었습니다.
꼭 이런 자리에서 말없이 봉사하면서
챙겨 주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가냘픈 몸매와 겁
먹은 듯한 큰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사람입니
다. 9년 전 채석포교회에 부임하고 전도한 첫 열매입니다.
나이든 집사님의 처남 댁이라는 것만 알고 심방했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여러 곳
에 부적이 붙어져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부적을 제거하자고 하니
까 자기들이 제거하겠다고 하며 주일날 교회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90
세가 넘은 할아버지만 빼고 부부와 네 자녀가 출석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아이들의 외할머니께서 무당이고 큰딸인 아이들 엄마가
신 내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갈등 속에서 어머니의 뒤
를 잇지 않기로 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가서, 나는 어머
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말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해도 그 집만큼은 전도에서 제외 될 것이라고 생각했
던 주변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고 있었습니다.
몇 달 출석을 잘하다가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궁금
하여 심방을 했으나 핼쑥하고
창백한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으며 마음이 너무나 견고하게 결빙되어 있었습니다. 어렵
게 입을 열면서, 본인 스스로 신앙의 성장도 없고 남편과의 잦은 다툼과 변화되지 않
는 생활 속에서 절망을 느끼며 이대로 그냥 주저 않고 싶다고 했습니다.
목사인 남편은 정말 하기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무당
인 것을 유산으로 남겨 주고 당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으냐”고 말했습니다. 아이
들 모두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안쓰럽게 울고 있는 모
습을 남겨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석이 아름다운 것은 그냥 빛나기 때문이 아니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아픔을 견디고 자
신의 몸을 갈아내는 수많은 인고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성령
님의 도우심으로 다음 주일부터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소나기가 쏟아진 후 아름다운 무
지개가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찬양을 부를 때도 울고, 대표 기도할
때도 울고, 울보 집사님입니다.
성가대를 지도하면서 찬양뿐만 아니라 나의 삶과 읽었던 책 중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r
사랑과 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울보 집사님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많이 아팠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한 아버지가 어머니
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다니다가 신병을 앓고 있음을 알고 궂을 하고 그 날부터 무당
의 길을 걸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무당이 되는 그 날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데 부엌에 앉아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면서 아픈 기억들을 상기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 때부터 어머
니의 일을 돕다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를 두 분 모시고, 2대 독자인 남편은 어른들의 과보호 속에서 유약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시집만 오면 헤어날 줄 알았던 삶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버
거운 가장의 몫까지 해야 했습니다.
남편은 경운기 사고로 허리를 수술해서 힘든 일을 할 수 없고 본인도 디스크 수술과 약
한 몸으로 농사일을 할 수 없던 중에 남편에게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을 얻게 되었
습니다.
늦게나마 인생은 결국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을 알고 일을 찾던 중에 요양 보호사 교
육을 받았습니다. 항상 봉사하기를 소망한
집사님은 교육을 다 마치고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곳의 일자리를 기다리면서 인내를 배우며 자기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삶의 고통들이 너무 무거울 때도 있었지만 서울에서 직장과 공부하다가 귀향한 자녀들
과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우리들
의 첫 열매는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자식이고 동생이며 누이입니다.
외할머니도 일을 그만 두시고 수전증을 심하게 앓고 있어 요양 보호사인 딸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모처럼 나이 드신 아버지도 어머니와 같이 집에 계
셨습니다.
야위고 구부러진 아버지의 몸을 주물러 드리면서 기억 속에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과자
나 선물을 받아 본적이 없어 섭섭했던 마음이 들어 용기를 내어 떨리는 목소리로 “아
버지, 나, 가방 하나 사 줘”라고 했답니다. 어릴 때부터 무당 일을 하시는 어머니만
을 보호하기 위해 큰딸인 자신에게는 너무나 인색했던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의 응어리
가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그래, 사 줄께” 하면서 시장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시장 것말고
비싼 것
으로…..” 했는데 나이 쉰이 넘은 딸의 투정 같은 응석에 단 한번의 거절도
없이 기쁘게 딸의 청을 들어 주었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아버지에
게 선물을 받고 싶은 소망을 이루었으며 쉰 살이 넘어서야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치
료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쉰 살 넘어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아
때로 열등감은 인생을 역전시키는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이 되는 것처럼 부모님들의 영
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족 찬양 때
“나 같은 죄인 실리신…..”을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들의 가족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