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개혁주의 신학의 길
< 한병수 박사,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졸업 >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 갖추어야”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엄격한’‘건조한’‘죽은’‘지나치게 사색적인’‘차가운’등의 수식어로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이러한 비난은 단지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의 성향까지 겨냥한 지적이다. 이럴 때 반박의 격한 손 사레를 치기보다는 성찰이 우선이다. 물론 적당한 변명도 필요하다.
이눌서 선교사가 잘 지적한 것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감정이나 감흥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세에 의존하는 법도 없고, 나에게 유익이 된다거나 끌리는 호기심에 맡겨지는 법이 없으며, 상황의 시급한 필요에 맞추고자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붙들고 따른다는 정신을 고수한다. 게다가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으니 정나미가 뚝 떨어질 수 있는 체질을 가졌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각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든다. 각자의 마음을 격동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깊고 꾸준한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 개인으로 하여금 외톨이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친밀감이 가장 높아야 할 신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그런 이해에는 이르지를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믿음의 유무를 떠나 상대방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항구적인 끈기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신학이다. 찬동과 계승을 독촉하지 않는다. 강요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님의 역사에 내맡긴다.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끈덕진 기다림에 있어서 실패했다.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성을 거부하고 신론 중심적일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우리의 성정에 거북하고 때때로 상식과도 어긋나고 우리의 존재감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나는 광야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고 무익한 종이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 신학은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학이다. 엄청난 손실과 상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당연히 ‘독종‘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 성향의 소유자가 풍기는 인상은 친절과 매력과 감화력과 심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인물들과 신학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분들에게 객관적인 명분과 실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장 값없이 나누고 공유할 가장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고,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를 갖추는 수밖에 없다.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설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의 ‘살벌함’을 풍기고 알리는 것을 마치 개혁주의 기수의 표징인 것처럼 여긴다면 서둘러 그런 의식에서 돌이켜야 하겠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고수하는 자는 기쁨과 즐거움과 자발성과 희열과 감격으로 충만해야 한다. 내용을 담는 정도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주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한 이유가 그 계명을 즐거워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길을 즐거움 중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향기롭고 매력적인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길도 즐거움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는 객관적인 내용의 마땅한 수용이 주관적인 즐거움의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자의 자태여야 한다. 우월성에 도취되어 서두르고 위협하고 독촉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수용하지 않고 거부와 비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친절과 관용의 자세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과연 개혁주의 신학의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본성적 부패를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우리가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이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진리를 아무리 거부하고 멸시하고 멀리해도 기이한 일로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허무는 무리들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고 저항하다 보면 발등의 불끄기에도 급급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방위적 침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독한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거칠고 딱딱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높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주는 희열이 식어서는 아니 된다.
요약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적 부요함과 그것을 전하고 공유하는 자의 고결한 자세를 늘 겸비해야 한다. 내용이 빈약한데 자세만 고매하면 안 되겠고, 자세는 뻣뻣한데 내용만 부요해도 안 되겠다.
이는 진리의 이성적인 정보취득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전인격적 체득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학교와 교회의 막중한 책임이 여기서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