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 콤플렉스_정요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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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콤플렉스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자신의 미련함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경고 놓치는 경우 종종 있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흥선대원군에 대하여 “외척의 횡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시정배와 어울리면서 서민층의 고통을 체험한 야심만만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한다.

 

안동 김씨 일족은 외척으로 3대째 영화를 누리며 기상이 꿋꿋한 왕족은 누명을 쓰여 모두 죽였다. 그래서 이하응은 도총관이란 직위를 미련 없이 버리고, 술과 노름과 기생질을 하며 간사한 미소와 비굴한 태도로 김씨 일가의 잔칫집을 일부러 전전했다. 하지만 그의 도총관 시절 뜰의 먼지 하나, 추녀 끝의 거미줄 하나 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하여 일부러 비굴하게 행동을 했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도록 여러 일을 꾸며 끝내는 이루었다.

 

그런데 그런 철두철미한 그도 한 가지 큰 실수를 했으니 자기 아들의 부인이 이미 어렸을 적에 혼약이 되었음에도 민씨(閔氏)를 택한 점이다. 흥선대원군이 민씨를 명성황후로 택한 것은 천애의 고아라는 점이었다. 외척의 방자한 정치개입을 진저리나게 경험한 그는 ‘가까운 일가가 없는 양반집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훗날 동성동본이면 모두 일가라 하여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여 시아버지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꺾어버렸다. 흥선대원군은 각종 비굴한 짓과 치밀한 계획을 통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이 선택으로 그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는 명성황후에게 꺾여 좌절되었을 때 콤플렉스에 빠졌을 것이다. 자기가 택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의 적이 되지 않을까, 자기가 내린 결정들이 예측과 달리 진행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가졌을 것이다.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었을 때 밀로를 건축하고, 다윗의 성읍이 무너진 것을 수축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럴 때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큰 용사로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고 그를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왕상 11:28).

 

성실하고 능력있는 부하 직원을 발견하여 밑에 두는 기쁨은 매우 크다. 여로보암을 감독관으로 임명한 그날 솔로몬은 매우 기뻐 집으로 돌아와 자기의 아내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훌륭한 부하를 주었다며 자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솔로몬의 총애를 받아 감독관이 된 여로보암이건만 바로 그가 솔로몬이 죽은 후 10지파를 빼앗아 나라를 분열시켰다. 그 이후로 두 나라는 멸망하기까지 통합이 되지 않았다. 솔로몬 또한 믿는 부하로부터 발등을 찍힌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나뉜 것은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뒤통수를 치며 돌아섰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가까운 원인이고, 보다 먼 원인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돌아섰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여 아내로 삼았다. 이 여인들은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으나 그는 여인들에 빠져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 나라를 나누어 솔로몬의 신하에게 주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흥선대원군 콤플렉스가 없는가? 나도 목회를 하며 성도로 인하여 쓴 맛 단 맛을 보며 사람이 무서워져 간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면서도, 맹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이다. 그 작은 머리와 그 세치의 혀에서 나오는 계략과 말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작은 교회이기에 새로운 성도가 오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이들이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되어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스쳐간다.

 

나는 이런 불안을 나의 삶의 태도와 내용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없는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다른 불순한 의도가 없는지 살피며 이겨낸다. 카다피가 시민의 총을 맞고 사살된 것은 지난 40여 년간의 독재에 있다. 비록 저항하는 시민군이 2011년 10월 20일에 그에게 총을 쐈지만, 그의 지난 40여 년 동안의 독재가 그런 결과를 부른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갈수록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좋은 것이 언제 나쁜 것으로 변할지 모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기뻐하고 너무 분노하는 대신에 오늘 하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였는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무게를 알고 그에 따라 살고자 하였는지 살피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우리 교회에 오는 성도들을 최대한 환영하고 섬기려고 한다. 그들이 내 뒤통수를 치고, 나를 힘들게 해도 내가 받는 상처들은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다. 누구처럼 총을 맞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나의 잘못에 대하여 이미 여러 번 경고했음에도 내가 미련함과 욕심으로 알아듣지 못했을 때 누군가를 통하여 치시는 것이다. 나의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떻게 사람을 인한 힘듦이 없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삶이란 것은 그런 힘듦과 배신과 뒤통수침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힘들어하며 이겨내고, 상처줌을 후회하며 깊이 미안해하고, 그러면서 그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외침과 경고를 듣는 것이다. 그 힘듦을 통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 자리에 사람을 세우시는 줄 알고, 깊이 겸손해진다면 우리는 괜찮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벨사살 왕처럼 석회벽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넓적다리 마디는 녹는 듯하고,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