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그리스도의 부활 증언과 파피루스 4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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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 증언과 파피루스 46번

 

< 김영규 목사·남포교회 협동목사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바울서신 파피루스에 AD70년대 이전에만 발견되는 초서체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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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과 그 목자들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자들이다. 사도들이나 처음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로서 그 목격된 내용과 그가 전한 모든 말씀, 즉 승천하신 그 그리스도가 땅에서 지금도 말씀하실 수 있는 말씀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나 학자들은 지금 그 부활이나 승천을 증명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혹은 승천하시사 같은 말씀으로 말씀하신 그 목소리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중요하고 그 말씀들만을 전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마지막으로 부활의 그 신령한 몸을 목격한 유일한 사도는 사도 바울로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한 증인들을 정리해주고 있다. 그 모든 기록만큼이나 그의 증거도 참됨을 믿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의 편지들을 그의 생전에 모았는지 아니면 바로 그의 순교 직후에 모았는지 모를 정도로 1 세기 안 도미티안 황제 집정 이전으로 분명히 돌려야 할 그 바울 사도의 편지모음집(P46)이 지금부터 거의 80년 전에 땅에 파묻혀 있다가 몇 차례 걸쳐 공개되었다.

 

로마 통치 지역의 전 영역을 통해서 매 4시간마다 문서들이 전달되는 포발제도가 발달한 그 사회에서 바울 사도의 편지모음집이 그렇게 멀리 나일강을 따라 발달한 도시사회들에 전달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자료가 다른 지역들에서는 계속 보존이 되지 못하였지만, 통치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지역에도 그 책을 소지하는 자들이 있어 오랫동안 보관되어 읽혀졌었으며, 데키우스 황제와 같은 대 기독교 핍박의 시대에 땅 속에 파묻혀 있다가 20세기 초기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 보급이 교부들의 기록으로부터 전혀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평범한 사건이었겠지만 긴 역사 과정에서 보면 너무나 귀한 자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교부들의 기록이나 20세기까지 교회사에 대한 이해로 어떤 편견을 가진 파피루스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파피루스들에 대해서 연구해 본 적인 없는 자들의 그 파피루스에 대한 평가들이 마치 권위가 있는 평가처럼 인쇄물들에서나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언론들의 침묵처럼 어두운 면이다.

 

필자와 편지를 교환한 학자들을 상기하자면, 1988년 그 파피루스에 대한 재평가에 대한 논문이 발표될 때까지 많은 파피루스들의 실물들에 의해서 잘 훈련된 파피루스 전문가들이라면 필자에 의해서 제시된 누구나 놀라워할 결정적인 증거들 자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특별히 B.P.Grenfell과 A.S.Hunt에 의해서 19세기 말부터 발굴되었지만 아직도 출판 되지 않는 파피루스들과, 출판은 되었어도 그 원본들의 모습들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모든 파피루스들의 사진들을 보관 및 관리하고 있었던 옥스퍼드의 Ashmolean 박물관의 파피루스 고서장이었던 Revel Coles 박사가 논문 출판 당시 그 초고의 제목에 빨간 글씨로 주후 1세기 후기로 수정하고 동의해 주어 본문의 결론은 수정하지 않고 제목만 수정하여 출판하게 되었다는 필자의 출판후기를 지금 언급하고 싶다.

 

물론 세계적으로 연보 외에는 그런 논문을 출판할 수 있는 정기 잡지가 드문 상태에서 불란서의 한 고서 필서체를 다루는 잡지와 이태리의 한 파피루스 전문잡지에 원고를 보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로마 교황청 신학잡지에서 출판하겠다는 뜻을 먼저 보내와 그것에 동의해 줌으로써 다른 잡지로부터의 출판기회를 접어야 했던 기억도 있다.

 

한편 출판될 학술잡지(Biblica)의 편집인들과의 서신교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정되지 못한 각주 하나에 문자오기나, 한 파피루스에 있어서 드라크마의 약자를 coronis로 잘못 해석한 한 부분에 대해서 세계 독자들에게 이 글을 통해 알리고 싶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제외하고 그 논문의 결론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일반 문서들의 필체가 아닌 문헌들의 필서체 안에서 초서체의 발견은 그 연대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데 그 바울 서신의 파피루스 책에는 그 중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 말로부터 주후 70년대 이전에서만 발견된 특별한 초서체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런 결론의 가장 큰 증거이다. 다른 증거들은 더 이상 도미티안 황제시대보다 뒤로 갈 수 없는 증거들이고 그 문자모양 중 특별히 ‘베타’가 주목이 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 중에 주전 3세기 초로부터 주후 3세기까지 넓고 좁은 문자들의 대조로 정서된 소위 ‘엄밀한’ 필서체로부터 유일하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각진 파이(Phi) 문자 모형을 근거로 하여 P46의 연대를 2세기나 그 중엽 이후로 끌어내리는 E.G.Turner의 주장을 동조하는 비전문가들의 입장들이 있는데 그런 견해는 진실을 모르거나 숨기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주후 79년 화산 폭발로 무너진 옛 로마시대의 폼페이 옛 유적으로부터 18세기에 발굴된 약 1800개 두루마리들의 증거들 중 주전 3세기 초와 같은 오래된 엄밀한 필서체도 증거되고 있지만 로마시대 초기까지 존속되고 있는 그런 엄밀한 필법도 잘 증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티베루스 로마황제 시대의 한 문서 필체에서 그런 엄밀한 필체로부터 각진 파이(Phi) 문자 모양의 특별한 영향이 증거되고 있듯이 P46과 같은 필법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 엄밀한 필체로부터 파이(Phi) 문자모양의 특별한 영향은 오히려 그런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만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증인들의 기록으로서 부활의 증거를 거절할만한 증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