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과학적 회의주의와 교회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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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회의주의와 교회의 자세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과거 어느 때보다 말씀에 대한 바른신학 절실한 교회”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들이 있어왔다. 방법론적 회의주의, 무신론적 회의주의, 변증법적인 회의주의, 실존적 회의주의 등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회의주의라는 정의를 오래 전 그리스 사상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회의주의자들(hoi ephektikoi)이란 “사실들에 대해서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된 자들을 의미했다. 문제는 지금 현대시대에 와서 그런 자들을 과거와 달리 흔하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배경에는 현대과학을 통해 그런 회의주의가 아주 객관화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 근거로 우선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의 파장의 범위가 400-700nm(나노미터)라고 한다면, 대부분 물질세계의 기본단위들이나 질서들은 그 파장의 크기보다 작다는데 문제가 있다. 또한 그런 가시광선의 크기보다 작은 파장을 만들기 위해서 에너지를 크게 하면, 우리의 눈이나 신체에 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세계는 항상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식하고 그런 간접적인 정보를 가시광선의 정보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 더 방법과 대상이 서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확률적인 문제로서 확대될수록 더 심화된다는 점이다.

 

과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두 번째 근거로서 거시세계에 대한 불가해성 문제이다. 즉 우주의 마지막 가장 먼 정보는 가장 오래된 정보로서 계속 가속으로 팽창하여 온 우주의 현 정보에 대한 것이 아닌 가장 불확실한 정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되는 최초의 정보와 마지막 정보가 가장 불확실한 정보라는 것이 과학적 객관성의 치명적인 부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과학적 회의주의의 근거로서 기존질서를 파괴하여 발견된 더 근본적인 질서는 에너지가 더 큰 세계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주질서의 더 작은 정보단위를 발견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기존 질서의 대상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계로 가는 방법도 파괴하는 것이요 그 보다 훨씬 전에 관찰자가 없어지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런 불가해성은 그 자체로 가장 객관적인 허무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지금의 허무주의란 사상적 허무주의나 이론적 허무주의로부터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 허무주의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엄청난 재난이나 전쟁 후에 느끼는 허무주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허무주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미래의 정치, 경제사회 및 종교사회가 이런 허무주의를 예측하지 못할 때, 그 존립은 아마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 어떤 합리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특징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단위들이 더 작은 단위로 쪼개어질수록 경우의 수는 무한성으로부터 더 무한성으로 늘어나고 그 만큼 기존 한 질서의 필연성은 더 큰 필연성으로 증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질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르면 모를수록 기존질서에 대한 신비는 더 커진다는 말이 되고 그것에 비례하여 종교성은 예상 밖에 더 깊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미래사회는 여기에 위험성과 위기가 있다.

 

우리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는 혼돈 자체가 질서를 성립시키는 기본 단위라고 했을 때, 문제는 개개의 질서가 그런 반응-발산 체계(reaction-diffusion system)로서 그 질서가 의존하는 전체 경우의 수가 무한의 무한 승의 수와 같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은 수라는 것이다.

 

우리 세계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창문이 없다는 것과 우리 질서의 모든 필연성이 의존하는 그 전체의 그 무한 수가 서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즉 무로부터 명령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기뻐하신 의지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지각의 마지막 문제인 색 자체나 소리 자체를 현대과학이 풀지 못하고 있다.

 

색 자체는 빛 속에도 없고 뇌로 가는 마지막 층에도 없다. 인간 전체와 자연 전체가 동원되어 거기에 색이 있고 소리는 들리지만, 사실 자체인 색 자체나 소리 자체가 어디로 왔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에 의해서 외부 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일 때, 그런 현상 뒤에 뇌 세포들의 가지치는 그물 망(the synaptic pruning network of dendrite spines)에 있어서 결함을 약에 의해서나 외부 요인들에 대한 조절에 의해서 치료가 가능하지만, 그 요인들을 알고 치료가 가능하였다고 해서 그런 결함에도 나타나는 색 자체나 소리 자체의 비밀을 정복했다는 말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계 질서에 대한 불가해성이 더 깊어질수록 과거와 지금도 똑 같은 질서에 대한 오용으로 인하여 사회의 무질서나 교회의 타락은 어느 때보다 심각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느 때보다 말씀에 대한 강조와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는 바른 신학에 대한 요구가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바른 교회는 이런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끊임이 없는 분발을 필요로 한다. 어느 때보다 더 헌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과 섬기는 자세, 기존 자연적 질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 그것을 넘어 진정한 사실로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교회생활과 설교에 크게 반영되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