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경제 윤리와 교회의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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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윤리와 교회의 도덕성

“하나님의 섭리는 절대적 필연성 갖고 있어”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사람들은 기업의 성장 단계들을 나누어 경이(wonder)의 시기, 실책(blunder)
의 시기, 신화창조의 시기인 천둥(thunder)의 시기, 남을 가르치고 나누는 
시기인 약탈(plunder)의 시기를 지나 몰락(asunder)의 시기로 가는데 거기에
서 다시 경이의 시기로 들어서느냐 파산으로 가느냐가 결정이 된다고 말한
다. 

기업 윤리에도 정도가 있어

한 기업에 있어서 이윤추구가 극대화된 시기인 횡령의 시기에 바로 사회기업
으로 사회와 고통부담을 나누는 기업이 되는데 바로 그때 기업의 파산 위기
를 조심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개인이 기업을 이루어 손실과 이익의 균형점인 30개월을 지나 처음 
순수한 이익만을 얻을 때는 그 후 3년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과정
에서 기업이 
흥하고 망하는데 많은 변수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수익
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신용도에 따라 타인의 자본들이 모여지게 되
는데, 그때 자기자본의 비율이 낮아질수록 기업의 신용도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드러나고 지금 미국에서 나타난 거품경제의 실체는 자
본주의 정신 자체나 직접적으로 선진국의 자기자본 규제나 정책 입안자의 초
저금리 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근원적으로 거시경제의 숨은 연결망
인 인격체들의 자유로운 변수와 외적으로 서비스형 경제의 과도한 규모에 있
는 것 같다. 
그런 폐해는 한국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제품에 있어서 유통비용의 
비율이 너무 크다든지, 유통비용이 적더라도 중간 서비스 비용이 과도하게 
책정이 된다든지, 기업의 비자금 조성과 과도한 서비스형 인건비, 소비자들
에게 떠넘긴 이중적 과세들, 규제에 따른 높은 위험부담금 등 너무 많다. 
물론 미래사회가 서비스 사회로 가는 것을 누구도 막지 못하겠지만 가능한 
그 피해를 막고 국민의 기본 평등한 생활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
다. 국가나 가정의 대외 의존도를 낮게 하
기 위해서는 각 가정 에너지 수급
의 자급화가 가장 우선적일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선선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누구나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사회나 국가가 기
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각 종 규제들을 풀어 그런 규제들을 좀 더 긍정적인 권고 사
항으로 바꾸고 자기 행동에 자기가 책임을 지는 자유의 확대를 크게 해야 
할 것이다. 즉 작은 정부를 통해서 평생을 통해 첨단적 교육에 다양한 기회
들을 주고 개인적 직업의 다변화를 통해서 내수경제의 규모를 크게 하고 그 
질을 높여야 한이다. 아울러 일반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직업에 가장 첨단
의 친환경적 과학기술들이 필요로 함을 기억해야 한다. 
인권 등 자유의 확대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종교나 예술, 체육 등의 
문화생활에 있어서도 더 큰 의미를 갖는 과학기술교육에는 최근 첨단 정보들
의 구독과 첨단 실험장치들을 누구나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기회 제공이 그 
핵심이 된다. 이때 국가나 모든 사회뿐 만 아니라 교회의 공동생활과 그 선
교도 그 방향에 기여해야 한다. 
자연의 가장 첨단적인 기술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
이시다. 모세
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지금 같은 하나님께서 그
런 자연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자이심을 아는 것과 같다. 
같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지금 우리를 보시거나 보실 수 있
고, 우리의 생각을 읽거나 읽을 수 있으며, 우리의 말을 듣고 들으실 수 있
으며, 우리의 말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교회가 왜 믿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만 현재이고 우리로부터 먼 우주는 모든 과거의 세
계이며, 우리의 1초보다 작은 세계도 에너지가 높아져 가는 세계이기 때문
에 과거의 세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극 거시세계나 극 미시세계까지도 
보실 수 있다는 것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면, 모든 우주의 근본정보를 그가 생산하시는 것이며 그 때 그가 거
기에서 명령하시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밤하늘의 별에는 질서가 있고 우리 자신이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과거에 우주의 모든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움직
이고 있었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어떤 다른 방

언에서 다시 찾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찾는 선택과 보상이라는 경제 유전자들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설
명할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초끈 이론에서부터 두 점 사이에 임의성을 가
정한다든지, 아니면 중력이나 다른 모든 힘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절
대 가속(Cm)의 자유 공간에 그 근원이 있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우연성과 임
의성이 있다. 
그러나 그 임의성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들이 나타나는 행위나 영원한 성
자의 발생과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하나님의 행위처럼 하나
님의 실체에 따른 내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하나님의 행위로 
믿지 않고 더구나 내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행위이지만 외부 대상에 관계
된 하나님의 의지가 그 근원적 원인으로 되어 있는 영원한 작정과 예정 안
에 있는 내용으로서 임의성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지의 임의성에 의한 영원한 작정과 예정이란 
역사들에 따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행된 창조와 섭리에 의해서 특별히 창조
된 형식에 불과한 임의성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믿어야

따라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피조물들의 임의성들의 충돌은 세계의 역사를 
푸는 열쇠들이 아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두려
움에도 자유롭게 이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