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신드롬_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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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신드롬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너나 없이 목이 쉬도록 밤이 새도록 부르고 또 불러도 승리의 감격을 멈출 
수 없습니다. 월드컵 출전 48년만의 첫 승, 16강, 8강, 4강 진출의 함성, 거
리마다 집집마다 마치 8.15광복의 물결을 보는 듯합니다. 언제 우리가 이렇
게 하나가 되어보았습니까? 언제 우리가 이렇게 나라를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
까? 도대체 이 환희의 물결은, 이 하나됨의 바람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을까
요? 이 나비효과를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먼저 골문을 뒤흔든 작은 축구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공을 절묘
하게 차 넣은 실력 있는 선수의 발짓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선수
를 강인하게 훈련시킨 감독의 지도력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효과는 히딩
크라는 한 벽안의 감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열두 번째 선수
의 응원과 온 국민의 열기와 홈그라운드의 이점 등 승리의 조건
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한 지도자의 용병술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한 골케터의 
세리머니는 이를 입증했습니다. 대 포루투칼전에서 황금골을 넣은 선수는 막
무가내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어떤 몸짓으로 골인의 기쁨
을 나눌 수 있을까요? 그가 달려간 곳은 동료선수도 아니고 붉은악마 앞도 아
니고 바로 바로 그의 감독 히딩크였습니다. 그 어린 선수의 세리머니는 감독
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포옹은 분명 참다운 스승의 은혜에 보답
하려는 제자의 몸짓이며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
었을 것입니다. 

이제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라는 농담까지 생겨났습니다. 기업도 정치권도 
너도나도 히딩크 배우기에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히딩크 신드롬
을 통하여 하나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비젼과 카리스마가 
리더십의 새로운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히딩크 신드롬을 통하여 다시 배
울 것은 바로 ‘지도자가 문제’라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잘하면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고 직장이 살고 교회
가 산
다는 것입니다. 축구 경기의 성패가 한 감독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번 월드컵을 통하여 체험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정치지도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짧은 한국근대사를 통하여 배워왔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교회
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짧은 선교 역사속에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빠
른 속도의 성장을 보여준 것도 다 피땀 흘려 애쓰고 울부짖는 목회자의 헌신
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는 그 책임을 미루는 비겁한 지도자가 생겨나
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부흥의 원동력을 평신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하더니 이제 모든 책임을 평신도에게 넘기자고 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이
나 교회역사를 보면 소위 평신도라 일컫는 성도들에 의해서 신앙의 대 부흥
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분명 인격 있는 지도자와 능력 있는 설
교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유 있는 국민의 함성과 감독을 향한 갈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
습니다. 한사람의 영웅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영웅주의(heroism)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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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국교회의 갱신을 염두에 두고 목회자의 자질문제
를 드러내놓고 고민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종아리를 치는 
심정으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의 장래는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대책이 무엇입니까? 결국 목회자
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락하고 있는 한국축구가 한 
감독의 지도력에 힘입어 회복한 것처럼 성장의 둔화를 두려워하는 한국교회
의 현실 앞에서 참다운 목회자들의 지도력을 기대해봅니다. 문득 ‘껍데기 목
회자는 가라’는 책제목이 하나의 공이 되어 가슴의 골문에 와 꽂혀 심장의 네
트를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