質이냐 量이냐/김훈(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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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건물 하나 짓는 데만 7백년 가까이 걸렸다는 독일 쾰른대성당. 쾰
른 중앙역을 유레일로 통과했거나 그곳에 가 본 사람이라면 우선 그 엄청
난 규모에 압도되고, 내부의 화려한 장식에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직도 한쪽에서는 신축과 보수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이 어마어
마한 교회가,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전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의 사진
뒷 배경으로 활용되거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고적 취급을 받는 것으
로 그치고 있음은 이방 순례객의 마음을 여간 씁쓸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
다.
유적 취급받는 교회
서구교회가 이미 오랫동안 퇴락의 길을 걸어왔고, 그나마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대부분 노인층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유명한 몇 교회에만 가 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거대한 예배당들이 장엄한 파이프오르간
소리만큼이나 무거운 역사에 눌려 있고, 그래서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겹
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공기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음을.
사람이 살아서 숨쉬지 않는 
교회, 호화스러운 각종 성물로 가득 장식돼
있으면서 텅빈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교회, 그저 한바퀴 둘러보고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교회란 한낱 거대한 기념비적 유물일 뿐이다. 관광
입장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은 모이기에 열심인 것 외에 마땅히
보여줄 게 없는 우리에게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또 다른 자화상이기도 하
다.
우리의 자화상
서구교회가 교인없는 텅빈 유적지로 변해 가고 있다면 우리의 교회들은 기
복주의와 개교회주의의 병이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교인들로 넘쳐나는
대형 교회들 상당수가 개교회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증거는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교회가 무려 23개나 포진하는 초대형화 현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선교 2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가 전체 기독교회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 형
성에 실패하고 사회적 고립 마저 자초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문제보다
사사로운 복락에 봉사하는 기복주의 신앙으로 변질되는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기복주의’라는 병
그는 이 논문에서 한국교회의 잘못된 기복주의를 대표하는 경향으로 △교
회 신축을 위한 부흥회 등 교회의 
내적 필요에 의해 열리는 특별의례, △
대학입시를 위한 기도회 등과 같은 내 교회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행사의
성행, △복받기 위한 헌금을 부추기는 행태와 직분에 따른 헌금액 배분, △
목회자에 의존해 복을 비는 현상의 심화, △기도원에 의한 치유와 축귀(逐
鬼) 등 귀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등 다섯 가지를 들었다.
물론 한국교회, 특히 대형 교회 전체를 이 같은 잣대로 잴 수는 없다. 대부
분의 교회들은 선교와 교육, 봉사의 조화 속에 균형있는 튼튼한 성장을 계
속하면서 한국과 세계를 ‘하나의 교구’로 삼아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교회인 독일 교회의 경우도 텅빈 교회당 안과는 대조적으
로 밖의 풍경은 너무나 딴판이다. 1백년이 넘게 매 2년마다 도시를 순회하
며 열리고 있는 ‘독일교회의 날(Kirchentag)’ 행사만 봐도 독일교회 아
니 서구교회가 가진 또 다른 얼굴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자유분방
함은 가끔 우리의 상식선을 뛰어넘기도 하지만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초점
을 맞춘 정연한 질서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개회예배가 열리는 광장에
아침부터 모여 들기 시작하는 수 십 만명의 개신교인
들의 모습을 보고 나
면 유난히 수(數)에 민감한 한국교회도 할 말을 잃게 된다.
서구 사회와 문화 전반에 깔린 기독교회의 저력은 이제 수 백년된 교회 건
물을 빠져 나와 자유와 평화, 검약과 질서의 든든한 디딤돌로 제 몫을 하
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파워가 넘쳐나나 사회를 향해서는 힘을 쓰지 못하
고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인 우리 교회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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