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박윤선의 정신은 어디 있는가
정암 소천 20주년을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들의 실태를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정암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의 업
적만을 부각시키고 그 열매만을 우려먹고 있지 않는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때이다.
우리 교단이 지내 온 지난 30여 년의 시간은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정치적 격
동기를 통해 시작되었다. 예장합동의 분열로부터 시작된 1980년의 한국교회
의 정치적 격동기는 때마침 불어온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열풍과 그 맥을 같
이 하고 있었다.
1979년 9월 대구 총회의 분열과 더불어 시작된 격동기는 급기야 10월에 박정
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1212사태로 이어졌고, 이윽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격동기가 진행되는 동안 지난 몇 년
간 총신신학원의 개혁을 주장하던 재학생들이 급기야 정든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합동신학원을 태동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당시 총신신학원 재학생들은 몇몇
은사들과 더불어 개혁의 뜻을 함께 펼쳐가
기 위해 정암을 청빙하였다. 평생의 염원이었던 주석 원고 작업에 혼신을 기
울이고 있던 정암은 기꺼이 이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공부하다가 죽자” “먼저 내가 개혁되자”는 정신으로 오늘의 합동신학대
학원대학교의 초석을 세웠다.
정암은 초대 합동신학원 교장을 역임하면서 “교역자가 실력 없으면 거짓되
게 된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인생 8년을 아낌없이 헌신하였다. 그 기간 동
안 정암이 이 땅에 심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칼빈의 정신을 계승한 개혁주
의 신학과 사상이었다.
정암은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의 불모지였던 한국교계에 최초로 개혁주의 신
학을 접목한 선구자였다. 그리고 우리 교단과 합동신학원은 바로 그 정신 아
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라는 삼대 개혁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지난 30여 년을 묵묵히 정진해 왔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 우리는 정암을 내세우는 일에는 열심을 다하면서도 정
작 우리들이 정암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에게 정암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는 우리가 정암과 같은 개혁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먼저 내가 개혁되자”는 정암의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명실공히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을 이 땅에 널리 펼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