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길
< 김관성 목사, 덕은침례교회 >
“순간의 말초적 자극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결국은 멸망일 뿐”
20세기의 인간 사회를 지배했던 정서는 ‘공허함과 말초적 자극’입니다. 그래서인지 과학에 기반을 둔 기술문명의 발전은 인류를 향하여 수많은 것들을 약속했습니다. 보다 많은 질병의 정복, 보다 풍요로운 삶, 보다 안전한 세상이 그것입니다.
당선만을 목표로 삼는 정치꾼들이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남발하는 것처럼, 현대 문명도 인간들을 향해 엄청난 ‘거짓말’을 쏟아놓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허풍’이었습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현대문명은 약속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희한한 현상은 보기에 좋았고 탐스럽기까지 했던 그 문명의 약속들이 실제로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은 인간들의 정신을 황폐함으로 몰아갔습니다. 뭔가 모를 ‘불안감과 공허’가 인간들의 영혼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계몽주의가 인간 사회를 향하여 수많은 공약을 남발한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은 그 공약이 실현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단절과 소외 속에서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할지 그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기술과 재화를 가지고는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총체적인 무질서와 영혼의 갈증과 혼란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과 여건을 통제할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사실 이것은 불가능 합니다만, 인간의 내면세계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칙연산만 배우고 나면 수능 수학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 중에서 그 사고의 깊이가 남다른 자들은 인간들의 마지막 종착역에는 ‘허무’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사르트르, 카뮈, 이오네스크, 베케트, 핀터, 하이데거 등등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만의 필치와 표현법으로 공통적인 내용을 펼쳐냈습니다. 그것은 ‘공허한 세계’였습니다. 타고난 두뇌를 가지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사유해보았지만 인생과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기반’을 찾아낼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인 토대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들이 달려갈 곳은 ‘자살과 놀이’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고의 경향이 보통 사람들보다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의외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살아봐야 별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지성인들이 내리는 대안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자살도 ‘자기사랑’의 일종입니다. “나 자신을 지금보다 더 비참한 자리로 끌고 갈 수 없다”는 확신이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점에 이러한 비참함에 시달리는 존재가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불행과 허무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기에 자살이라는 카드를 뽑아드는 사람들은 다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가 가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죽도록 공부하고, 취직하고, 일해서 확보한 재화를 통해 인생의 남은 시간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 순간이지만 지루한 인생을 버텨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기호에 따라 명예, 술, 섹스, 권력, 여행, 스포츠 등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삶의 허무를 메꾸는 방법은 순간순간 몸이 반응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하지 마라. 해봐야 답이 없잖아!” 이런 식의 사고의 경향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를 한번 보십시오. 최고의 히트곡들을 한번 보십시오. “뽀삐 뽀삐 뽀삐 오 예” “오빤 강남 스타일” 등과 같이 아무런 의미와 내용도 없는 가사를 그냥 반복하고 있습니다. 순간의 말초적 자극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영원함의 가치가 순간의 즐거움 앞에 항복을 선언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이 덧없는 것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 현대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내세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인들은 가야 할 방향의 상실과 허무함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이 수많은 즐거운 경험과 순간순간을 버틸 수 있도록 해주는 오락거리들을 제공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자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난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즐거움, 안락, 편안함을 역사 가운데서 실현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향하여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심판은 견뎌낼 재량이 없습니다. 이 심판을 이겨낼 새로운 세상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존재합니다. 오직 그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소망과 하나님의 용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삶의 참된 의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내신 그 일을 통해서만 의미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에 목숨을 걸면서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붓지 않습니다. 행복과 재미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참된 의미가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자신들의 간절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삶과 인생이 자신을 속이는 그 순간에도 신실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