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강
신약에서 평화의 의미와 신자의 역할
<김영호 교수 _ 합신, 신약학>
신약의 ‘평화’는 총체적 개념인데 미시적으로 개인의 건강, 안녕, 평안부터
거시적으로 새 세계의 본질까지 포함
바울은 오는 시대의 지배 원리인 은혜와 평화가 종말론적 성도들에게 있기를 기원한다
신자들은 개인적, 주관적 평화를 누리며 살면서 또한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 가야 한다
가. 들어가며
평화가 올 것인가? 한반도의 비핵화가 전 세계의 화두가 되고, 세계의 이목과 관심이 전쟁의 불씨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에 쏠려 있다. 남한의 대통령이 평양시민들과 북녘의 동포 앞에 서서 말한다. “지난 4월 27일 … 우리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습니다.” 기대에 부푼다. 예상과 다르다. 진행이 느리다. 양치기의 말을 들은 마을 주민들처럼, 처음에는 불신이, 다음에는 냉담과 무관심이 찾아온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대부분은 구경꾼이 되어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다. 더러는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행보를 위험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더러는 비핵화가 되고 통일이 된다면 지불비용이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대부분 일반 시민들과 다르지 않다. 때로 일반 시민의식에 못 미치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신자들 대부분이 성경에서 말한 “평화”를 개인의 주관적인 “평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공적 책임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나. 신약에서 평화의 의미
신약에서 “평화”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정치적인 의미가 주가 아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정념이 없거나(스토아) 동요가 없는 상태로(에피큐로스) 이해하는 철학과도 다르다. 미시적으로 개인의 건강, 안녕, 평안부터 거시적 새 세계의 본질까지 그 모두를 포함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사도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eijrhvnh 에이레네)”을 기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계 1:5),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친다(21:11; 22:1-5). 은혜와 평화로 시작하여 영광과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평화가 없을까?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약이 제시하는 평화의 종말론적 의미를 좀 더 살펴볼 때 드러날 것이다.
첫째,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을 받은 세상의 반대이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은 일곱 번째 나팔 속에서 나타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중간 환상들(12-14장)과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들 및 일곱 대접 재앙(15:1-20:15)이 나타난다. 그런데 14장에 등장하는 네 환상 중에 “영원한 복음”에 대한 환상(14:6-7)이 등장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14:7)는 것이다. “바벨론”으로 표현된 세상은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받는다. “그 진노의 전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14:10) 또는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16:19)을 받는다. 즉 이 심판에는 용서도 긍휼도 없다. 이때 사단도 사망도 음부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도 “불 못에 던져진다.”(20:10, 14-15). 이것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나타나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 장면들을 다시 멀리서 보면,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종말론적 심판의 반대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수 강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면 이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곳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탄생시 이미 알리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에이레네)로다”(눅 2:14). 이것은 분명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염두에 둔 선언이다(cf. 2:1). 일차적으로는 로마가 이룩한 평화, 전쟁과 소요가 그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세상에 평화를 줄 이가 로마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로마의 평화”는 정치적 정책 이상이었다. 이것은 로마가 섬기는 두 신들 중 하나였다. 로마제국인들은 이 신들을 부르며, 현시대의 안녕을 칭송했다. “평화와 안전!”(pax et securitas; cf. 살전 5:3). 이것에 중독되면 “어둠에 속한 일”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자고 있고 밤에 있다는 것을 자각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했다.
천사들의 찬송에는 “평화”와 “영광”이 우주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이라는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선언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하나님 나라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평화가 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평화를 주며,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그분의 나라가 평화와 영광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이것을 요한의 말로 하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와 영광의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모습이다(계 21:10-11; 22:3; 시 85:9-11).
그러면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기쁨의 사람들에게 준 평화는 어떤 성격의 평화인가? “평화”는 적의가 해결된 것이다. 두 대상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다.
첫째,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적대 관계가 해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 10). 여기서 평화(“화평”)는 객관적인 실제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던 것이 객관적 실제인 것과 같다. 이 객관적 적의가 객관적 평화로 바뀔 수 있는 원인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따라서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신자들을 위해 객관적으로 세우신 것이다.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므로, 평화는 칭의의 결과요 내용이 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자들 사이의 적의도 해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적의(“원수 된 것”)을 철폐하시고, 이 둘로 하나의 새 인류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서로 “평화를 만드셨으며,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cf. 엡 2:14-17).
그러면 평화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다른 믿는 자들과 관계에서 누리고 참여하는 객관적인 종말론적 실제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에이레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고 한다. 여기서 “지키다”(frourevw)는 말은 “도시의 성문을 지켜 든든하게 하다”는 뜻이다(BAA 1573-1574). 또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결정하게 하라”(3:15)고 말한다. 여기서 “결정하다”(brabeuvw)는 “심판으로 행동하다, 지배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말을 앞에서 거짓 경건과 겸손, 천사 숭배 등이 너희[의 존재와 삶]를 결정하는 심판관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할 때, 이 용어를 사용했다(2:18). 이 두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평화가 마치 인격체처럼 묘사된 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죄(롬 5:21a; 6:12, 14; 7:8, 20)나 율법(롬 5:20; 갈 3:24), 긍정적으로 은혜(롬 5:21b), 믿음(갈 3:23)이 인격체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이 단순한 의인화가 아닌 것과 같다.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지배자이다.
평화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신자의 마음과 생각에 참 왕인가? 하나님의 평화이다. 누가 신자의 마음의 통치자여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게 하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화, 현시대에 들어온 천국의 실제가 제국의 왕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는 뜻이다. 이 평화 안으로 빌립보 교인도, 골로새 교인들도, 우리도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안 인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은혜와 평화”를 구한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 등; 딤전 1:2; 딤후 1:2 “긍휼”). 이 문구는 그리스 편지에서 문안 인사 위치에 자리에 있다(caivrein; cf. 행 15:23b; 약 1:1; 행 23:26; Euseb, h. e. IV 13,1). 그래서 그리스인들의 문안(caivrein)과 히브리인의 문안(탗lv; 창 29:8)이 결합된 것일 수 있다(cf. Fung, Gal, 38). 그러나 “인사하다/문안하다”는 말과 “은혜”(cavri�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지만, 의미상 거의 연결점이 없어 보인다.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주어진 수많은 다양한 구원의 혜택의 대표이자 응축이다. 이 은혜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죽음과 정죄심판을 제거하고 주신 호의이다. 이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모든 축복의 완성이 “평화”이다. 하지만 은혜도 평화도 그 이상이다. 새 시대의 양육자요 지배자인 것이다. “내가 … 평화(샬롬)를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라”(사 60:17). 다시 말해서, 바울은 오는 시대의 지배 원리인 은혜와 평화가 종말론적 성도들에게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다. 신약 신자의 역할
신약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없어지고, 인간 사이의 적의가 제거된 객관적 평화를 받았다. 나아가 종말 세계가 침투하여 들어온 지금 종말 세계의 통치자인 평화의 통치를 받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평화를 만들 수는 없다. 평화를 만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작품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평화를 누리라고만 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샬롬)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샬롬)으로 너희도 평안(샬롬)할 것임이라”(렘 29:17). 포로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평화의 주관자를 섬기는 시민으로 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 신자들에게 더 높은 정체성을 주셨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9).
평화가 올 것인가? 아니 오지 않는다. 오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군사-정치적 평화 개념,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화 개념 외의 더 깊고 포괄적인 평화의 실제를 경험한 이들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화를 누리는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하여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십자가 안에서 종말론적 평화를 체험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시대초월적인 명령을 들으며, 평화를 지키는 것을 넘어 만들어 내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내 지역과 나라, 세계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적극 참여해야 한다.
김영호 교수
쪾한양대 원자력공학(B.S.) 합신(M.Div.)
Theologische Universiteit Gereformeerde Kerken (M.A.)
Evangelisch-Theologische Fakultat der Rheinischen
Friedrich-Wilhelms-Universitat Bonn (Dr.Theol.)
학위논문/ Die Parusie Jesu bei Lukas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있어서 예수님의 다시오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