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박윤선 30주기 기념대회 강좌| 아는 세대가 모르는 세대에게 _ 양승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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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박윤선 30주기 기념대회 강좌

아는 세대가 모르는 세대에게

 

<양승헌 목사 _ 세대로교회, 합신 1회, 파이디온선교회 사역자 훈련원장>

 

“한국교회의 흉년은 양의 급감, 질의 악화, 재생산 중단의 위기로 나타난다”

“정암의 교훈대로 말씀 연구, 말씀 순종, 말씀 교육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열정과 모본, 가정과 교회의 통합 사역으로 가르쳐 후세대를 세워야 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확장된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그 나라의 스토리를 아는 세대가 그것을 모르는 그 다음 세대에게 그 스토리를 이어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나오는 모든 “족속” 속에 가장 큰 족속, 한없이 연장되는 “땅끝”은 바로 우리의 다음 세대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운동은 내 세대 동안 열심히 뛰는 경주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그 달음질이 이어져야 할 계주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런 복음의 수직적 선포, 하나님 나라의 수직적 확장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지금 심각한 흉년에 접어들었다. 흉년이 들면 세 가지 일이 벌어진다. 물을 충분히 먹고, 양분을 흡수하여 껍질 속을 채워야 알곡이 된다. 그런 일이 잘 안되어 내용이 채워지지 않거나 반쯤 차다 가만 곡식은 세 가지 문제를 가져온다. 첫째는 양의 급감 현상이다. 둘째는 질의 악화현상이다. 셋째는 재생산 중단 현상이다. 쭉정이는 다음 세대를 만들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그 모양새가 되고 있다. 첫째는 양이 급감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 절벽의 변수가 사실이지만, 교회학교 아이들의 감소 비율은 일반 인구 감소비율보다 더 가파르다. 제대로 된 통계로 이 위기를 이닉하고 있는 한 교단의 교회학교 학생수의 감소 추이만 보아도 그것이 분명하다. (통합측 통계표 생략-편집자 주)

장신대 박상진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같은 10년 사이의 학령인구 감소율은 초등학생의 경우 -31.3%인데 이에 근거해 볼 때, 교회학교 초등학교 학생 수는 학령인구보다 10% 이상 더 감소했다. 중고등 학생의 학령인구 감소율은 -20.5%로서 교회학교 중고등학생의 감소율(30.2%)이 10% 가까이 더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학교 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도 문제지만 학령인구보다도 약 10% 더 감소하는 현상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성경학교가 없어진 것은 오래된 일이고, 주일학교가 없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 절반은 주일학교가 없는 형편이다. 한국 교회의 내일이 소멸되는 위기가 오고 있다.

둘째는 질의 악화이다. 부모님들의 믿음에 기생하는 더부살이 믿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음 세대가 자라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한 국에서 가장 큰 종교는 불교도 기독교도 아니라 대학교인 것 같다. 주일마다 학원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이 바쁘다. 시험 때마다 청소년부서의 출석수는 반 토막이 난다. 전도사 소견에 옳은 대로 교육이 이루 어지는 교회교육의 사사시대 속에서 아이들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심각한 퇴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자기중심 신앙, 현세적인 신앙, 형식화된 신앙, 무기력한 신앙 속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시들어 가고 있다. 부서가 바뀔 때마다 학생들이 떨어져 나가고, 결정적으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교회에서 멀어지고 있다. 2015 인구주택 총 조사 종교 인구 표본 집계 3에 의하면, “나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표시한 사람 전체 인구의 19.7%였다. 그 중에 “나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표시 한 청소년(15-19세) 전체 청소년 인구의 20.5%였고, “나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표시한 청년(20-24세) 전체 청년 인구의 18%였다. 그러나 2013년 CCC 설문조사4등, 기독교기관들의 조사에서 보면 “나는 기독 교 신앙이 있다”는 청소년은 조사 대상의 3.8%, “나는 기독교 신앙이 있다”는 청년은 3~4%에 불과했다. 그 통계에 대한 신뢰도는 논외로 하고라도, 이 통계는 한국 청소년, 청년 기독교인들 중 15% 이상은 기독교 가정 출신이거나, 어려서 교회에 다닌 경험은 있으나, 교회에서 떠났거나 믿음에서 떠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셋째, 흉년의 가장 큰 위기는 재생산 중단의 위기다. 사사기 2장 10절이 우리 교회에 재현되고 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삿 2:10).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3대를 보여준다. 1세대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2세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을 뿐이고, 3세대는 하 나님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몰랐다. 1세대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불렀지만, 2세대는 하나님을 우리 부모님의 하나님, 우리 조부모님들의 하나님으로 불렀을 것이고, 제3세대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 1세대는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배웠고, 2세대는 학습을 통해 배웠다면, 3세대는 하나님을 학습도 경험도 못한 채 자랐다. 1세대는 본질 과 형식을 다 갖춘 신앙의 세대였다면, 2세대는 본질은 없고 형식만 남은 쭉정이 신앙 세대였고, 3세대는 본질도, 형식도 다 잃어버린 이교도 세대가 되었다. 1세대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2세대의 삶의 기준은 세상이었고, 3세대의 삶의 기준은 오직 나 자신이었다. 이 신앙의 계대 단절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민족 공동체의 사활을 갈라놓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사사기 18:30절은 매우 가슴 아픈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경고 메시지로 거기 기록되어 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삿18:30).

북왕국 이스라엘은 722 B.C.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 우상숭배의 쓴 물을 물 댄 부족은 북쪽의 단 지파였다. 그 단 지파를 우상 숭배의 중심으로 만든 사람은 요나단이라는 레위인이었다. 섬뜩한 것은 그와 함께 기록된 그의 할아버지 이름이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영웅의 명예를 위해 ‘므낫세’의 손자라고 읽는다지만, 성경은 가림막 없이 그를 “모세의 손자”라고 명기한다. 할아버지는 민족을 해방시켰는데, 손자는 민족을 파멸로 이끌었다. 할아버지는 율법을 전달함으로 백성들을 축복했는데, 손자는 율법을 밟음으로 백성들을 저주했다. 모세의 가문이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믿음의 대 잇기가 실패할 때 이런 일은 우리 가문에도, 우리 교회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많이 대두되는 질문은 “어떻게”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어떻게” 라는 해결 방안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근본 원인이 규명되기 전에는 찾아지기 어렵다. 우리는 먼저 “왜”를 물어야 한다. 왜 이런 흉년이 오게 되었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보내 주신 정암 박윤선 목사에게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당한 흉년의 근본 원인은 말씀을 놓친 데 있기 때문이다. 박윤선 목사는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보내 주신 선물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과 헌신의 모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박윤선 박사의 말석에 앉는 제자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오늘도 그가 찍어 놓고 간 말씀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오고 오는 세대의 어린이들이 그 길을 따라 가도록 그 길을 넓히고 평탄케 하는 사역을 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박윤선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스승 에스라를 생각하게 된다. 에스라의 생애와 박윤선 목사님의 생애가 겹쳐지는 두드러진 세 가지 장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7:10).

에스라의 평생 삶의 목표는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에 순종하여 살고, 율법을 가르침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박윤선 박사의 평생 삶의 목표도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 말씀을 가르침으로 바른 믿음, 바른 삶, 바른 교회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것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지금 한국교회가 당한 흉년의 위기가 바로 에스라가 그랬듯이, 박윤선 목사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이 흉년의 근본 원인은 우리가 말씀을 놓친 데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이 위기를 위험의 때가 아닌 기회의 때로 바꿀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첫째는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언제는 말씀을 연구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와 가정, 사역자들과 부모들에게 말씀에 대한 열정이 회복되어야 한다. 에스라는 황제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성경학자였다(스7:6). 그런 성경의 전문가의 결심은 여전히 “율법을 연구하고”였다. 한국교회에 흉년을 가속화한 것은 속 빈 강정 같이 말씀이 빠진 교회교육이다. 교육 공간도, 교육 시설도, 교사도, 교재도 그 어느 때보다 좋아졌다. 그러나 우리 선배들이 가졌던 말씀에 대한 진지함과 집착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세워질 수 없다. 기독교교육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언젠가부터 성경은 따분하고 재미없고 어렵다는 미신이 교회 교육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교사들과 전도사들은 아이들이 지겨워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아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을까 봐 말씀은 최소화하고, 최대한 묽게 하고, 아이들의 입맛을 돋울 많은 MSG를 넣는다. 교회 교육 지도자들이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이들의 기쁨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 내는 엔터테이너들이 되어 가고 있다. 무슨 간식을 먹일까, 무슨 그림을 보여줄까, 무슨 프로그램이 재미있을까,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아이가 교회로 몰려올까, 어떤 장식을 해야 분위기가 살까, 교사들이 어떤 색의 앞치마를 둘러야 예쁠까….

속지 말라.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이들은 생명을 주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한 기독교 사회학자가 교회를 등진 대학생들을 인터뷰해 무엇이 그들을 기독교 신앙에서 돌아서게 했는지를 알아보았다. (에릭 메타삭스(Eric Metaxas), “젊은 무신론자들에게 배운다,”「크리스천 포스트」 2013. 7). 요약하자면, 교회가 말씀은 적게 가르치고 놀이를 많이 했다(Bible less, Play more)는 것이다. 아이들이 교회를 떠날까 봐 사용한 전략이 오히려 아이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든 전략이 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려면, 우리 지도자들이 먼저 그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려면 먼저 내게 그 말씀이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아이들은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공과를 대충 훑어 보고, 대충 재미있게 들려 준 주일 학교 교사들 때문에 많은 영혼이 교회를 떠났다. 내 손으로 성경을 펴고, 내 눈으로 본문을 읽고, 내 머리로 본문을 이해하고, 내 가슴으로 그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들은 것처럼 가장하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였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 말씀처럼 포장한 짝퉁 메신저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격려와 축복의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그릇된 삶을 살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설 기회를 막았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 23:21-22).

다음 세대 사역자들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정확하게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은 다리를 놓는(bridge building) 작업이다. 본문을 통해 주시는 진리의 말씀으로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의 문제에 답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아이들도 삶의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 말씀을 통해 뭐라고 답하시는지 모른다면 그들을 결코 말씀으로 세울 수 없다.

박윤선 박사님, 숨지시는 순간까지 말씀을 기뻐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연구했던 그 열정을 회복하여야만 한다.

 

둘째는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D. L. 무디 (Moody)의 말대로 성경은 정보(information)를 위한 책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한 책이다. 성경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8절 말씀대로 성경은 “사람에게” 마땅히 걸어야 할 바른길을 제시하고(교훈), “사람이” 그 길을 벗어났을 때 경고하며(책망),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바른길로 돌아서게 하고(바르게 함), “사람이” 그 바른길을 계속해서 걷게(교육) 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해석으로 적용을 대치하거나, 정보로 책임을 대치하거나, 지식으로 순종을 대치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반역이다. 적용이 없는 설교나 성경공부는 진리를 낙태시키는 것과 같은 범죄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전형이다.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진리가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순종으로 드러나야 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무엇을 깨닫는지에서 그치지 말고 그것이 순 종하는 삶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적용을 제시하여 말씀과 그들의 삶을 이어 주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왕께서 하신 말씀에 반응하는 합당한 태도는 “순종”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씀에 대한 태도가 한 사람의 생애나 나라를 어떻게 다르게 만드는 가를 보여준다. 같은 영토, 같은 백성, 같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지만, 사울이 다스린 40년 이스라엘과 다윗이 다스린 40년 이스라엘, 솔로몬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아주 다른 나라였다. 다윗,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통치하에 유다 왕국이 경험한 네 번의 부흥기의 공통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였다. 순종으로 말씀에 반응할 때, 그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나라로 설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은 한 사람, 한 가정, 한 사회, 한 시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이다. 아이들에게 우리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잠언은 말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29:18). 이 말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에만, 그의 삶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풍성하고 복된 삶으로 변화된다는 말로 뒤집을 수 있다. 이 일은 결코 말로 가르쳐질 수 없다. 삶으로만 가르쳐지는 교훈이다. 부모와 교사가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우리 다음 세대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말씀을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세 가지가 떠오른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는 무엇보다 열정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자신이 삶으로 순종한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황제의 은총 속에 살았지만, 그의 관심은 언제나 그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박윤선 목사님도 다르지 않으셨다. 성경 주석만 남겨 놓고 가셔도 얼마나 큰 기여를 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열정을 다해 지도자들을 세우기 위한 가르침에서 은퇴하지 않으셨다. 그 열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집트에는 1억의 인구가 있는데 그 중 10퍼센트인 천만 명이 크리스천이다. 마가가 복음을 전했다 해서 이집트 크리스천들을 콥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 신성만 주장하는 단성론(單性論) 때문에 553 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은 동방교회에도, 서방교회에도 끼지 못하는 이질적인 기독교 그룹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 곧 자녀에게 예수님을 각인시키는 그들의 교육적 열정이다. 그들은 모슬렘들의 무서운 핍박과 압제 속에서도 이제까지 1600년을 버텨 오고 있다. 지금도 1,000만 명이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이들에게 있다. 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세 가지 의식을 거행한다. 첫째, 기독교식 이름을 지어준다. 이집트 시민증에는 종교란이 있는데 회교와 기독교 둘만이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그러나 종교란을 보지 않고도 이름만 들으면 기독교인인 것을 알 수 있다. 마르코, 요한, 토마스 같은 기독교적 이름 때문이다. 둘째, 신생아를 교회에 데려와 유아 세례를 받게 한다. 온 교회 공동체가 나서서 아이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엮이도록 영적인 공동 육아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기의 오른쪽 손목 안쪽에 산양 젖에 담가 놓았던 바늘로 십자가 문신을 새긴다. 이름과 손목의 표시 때문에 평생 얼마나 힘든 삶을 살게 될지를 뻔히 알면서도 선대 부모들이 그렇게 해 왔듯 자녀세대 부모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영광과 축 복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낮은 사회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드러내고, 교회를 지켜가고 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말만이 아닌 모본으로 가르쳐야 한다. 모세는 그 원리와 전략을 신명기 6장 4-9절에서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필자는 이 구절을 다음 세대 사역의 중심축으로 여긴다. 이 본문을 공부하고 묵상하다 이 긴 본문이 L자로 시작하는 네 동사의 기둥 위에 서 있음을 발견하였다. 부모가 먼저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참 하나님을 알고(Learn),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며(Love),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Live),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말씀대로 사는 믿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Leave) 것이다. 이 네 동사는 단지 자녀 양육의 지혜나 기술만 제공하지 않는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대물림하는 중요한 원리도 제공한다. 이 네 동사들 중에 아이들과 관련된 것은 맨 마지막 동사 하나뿐이다. 이 행위는 선행되는 세 동사의 동작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위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 세대가 먼저 참 하나님을 알고(Learn),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며(Love),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Live)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말씀대로 사는 믿음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Leave) 수 있는 것이다. 이 재생산 과정이 지속될 때에만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축복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존속할 수가 있었다. 한국 교회의 내일은 우리 세대가 얼마나 바른 모본으로 말씀을 다음 세대에 가르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가정과 교회의 통합적인 사역이다. 성경적으로, 부모는 다음 세대 양육의 1번지로서 그 책임과 특권과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주일이면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교회 주차장에 도착하지만, 각자 다른 공간으로 흩어진다. 각자 다른 메시지와 다른 찬양으로 예배하고는 정해진 시간에 주차장을 비워 주고 빨리 집으로 간다. 가족이 함께 나눌 영적인 화두도, 관심사 도 없는 영적 이산가족이 되어 돌아가, 각기 제 삶을 살다 주일이면 또 다시 교회로 돌아온다. 이것이 우리의 스토리가 끊어지게 된 가장 심각한 원인을 보여주는 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물려주는 1번지 통로는 가정이다. 그러나 교회는 언젠가부터 부모들을 설득했다. 교회에 데려오면 아이를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 주겠다고. 교회는 아이들의 믿음을 키워 주는 능력과 책임을 가진 기관으로 자임하면서 부모들에게서 영적 양육의 책임을 떠맡았다. 문제는 교회의 이러한 생각이 가정과 부모 사이의 단절을 초래한 것이다. 이 단절은 단지 자녀 양육의 문제만 초래한 것이 아니다. 자녀를 양육함으로 부모가 서고, 부모가 섬으로 가정을 하늘나라 대사관으로 세우는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를 받게 되었다.

말씀으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교회와 가정의 통합된 사역이어야 한다. 부모가 동원되지 않는 한 교회 교육은 한 손으로 손뼉을 치려는 것과 같다. 교회에서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믿지 않는 가정이나 믿음이 제대로 서지 못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제2의 가정이며, 제2의 부모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바른 진리라는 에너지와 가정에서 공급되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에너지가 합쳐질 때 우리의 다음 세대는 건강한 믿음의 세대로 자랄 수 있다. 부모들이 말씀을 붙들도록 세워야 한다. 부모들이 말씀을 살아 내도록 세워야 한다. 부모들이 말씀을 가르치도록 세워야 한다.

말씀은 우리 모든 사역, 모든 삶, 모든 교회의 기반이 된다. 바른 믿음, 바른 생활, 바른 교회는 말씀과 한 방향 정렬이 될 때만 가능하다.

이 땅의 에스라 박윤선의 후예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 그의 이름은 우리 신학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공인 인증서가 아니다. 그의 이름은 말씀을 연구하고, 살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삶으로의 초대이며,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하여 살고 그들의 후대를 세우라는 시대적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