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박윤선 30주기 기념대회 개회 설교| 충성된 사람들 _ 홍정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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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박윤선 30주기 기념대회 개회 설교

충성된 사람들 (딤후 2:1-2)

 

<홍정길 목사 _ 정암박윤선30주기기념대회장, 남서울은혜교회 원로, 밀알복지재단 이사장>

 

자신의 죄악 된 참 모습을 바라볼 때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주님 외에는 내가 나 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충성은 참으로 믿을 때에 그 믿음의 표현으로 드러나고 그 충성은 오직 삶의 본(本)으로만 전해집니다

박목사님이 사모했던 은혜와 전심전력의 그 충성의 본을 지킬 때 진정한 종교개혁은 새로이 시작됩니다

 

딤후 2:1-2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이 주님 앞에 갈 날을 목전에 두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생애 전체가 그 본문 안에 녹아 있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음으로 전하고 싶은 가장 큰 메시지가 구구절절 맺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을 보면 인생을 살아갈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외모나 능력, 실력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을 보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능력을 보고 좋아하고 능력이 채 못 되면 돌아서고, 교회에서도 설교를 통해서 그 인생을 보는데 오직 성경만이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고 합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나를 찾는 자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외모를 보며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보십니다.

진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그리고 가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하며 두려움을 갖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무서운 전쟁을 앞에 둔 우리를 향해서는 ‘능력’을, 내 이웃을 향한 마음으로는 ‘사랑’을, 그리고 내 자신을 깊이 통찰하는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좋아하셨던 다윗의 생애를 성경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라고 합니다. ‘마음’입니다. 축복이나 주께서 말씀하신 팔복도 마음의 복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마음에만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에 관심을 갖고 생각하고 묵상하며 자신의 마음속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빛 앞에 내어 보는 자아성찰의 과정이 개신교에 거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온갖 이론을 통해 남을 보는 것은 참 잘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우왕좌왕하며 두려워하는 마음 대신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 곧 용기,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는 매일 자신을 말씀 앞에 통찰하며 근신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축복 중 하나이자,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기억하며 이야기했던 것은 다메섹 도상입니다. 그는 사건 앞에 갑니다. 이론 앞으로 가지 않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형언할 수 없는 복받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는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그처럼 걸작으로 살았던 자기 생애를 주변 사람들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며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기에 베들레헴 그 들녘에서 나를 붙잡으셔서 여기까지 데려 오셨습니까?’ 라고 고백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했던 그가 우리에게 마음보가 바꿔지지 않은 삶을 돌아보라 합니다. 그 마음, 그리고 주께서 내게 주신 것 이미 주신 그것을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바울은 2장 1,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은혜 안에서 강해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시작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2:8) 은혜로 우리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은혜가 나를 나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노력을 많이 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것 때문에 내가 나 된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 때문에 되었다 합니다. 다윗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116:12)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되돌아보면서 마음이 너무 허전했습니다. ‘오직 말씀’이라는 말만 계속할 뿐, 모든 중심은 루터와 칼빈에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실상 ‘오직 말씀’은 없었습니다. 루터가 말씀보다 앞서고 칼빈이 말씀보다 앞섰습니다.

‘오직 말씀’, 말씀에 실재가 없으면 그것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개신교가 계속 자유주의 신학과 싸우느라고 원리만 가졌지 실재는 못 가졌습니다.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인생이 참 부족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그 실재가 없으면 그 또한 거룩이 아닌 소리일 뿐입니다. 개신교 500주년을 돌아보면서 정말 거룩, 경건, 사랑 이것이 구체적으로 삶 속에 드러나는가에 대한 반성이 없는 신학적인 논제만 계속 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을 마음으로 참 존경하며 삽니다. 그분을 통한 은혜를 사모합니다. 80세 기념 모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0년 묵은 이 죄인이……’ 다들 기억하십니까? 제가 그때는 박윤선 목사님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 마음이 들어, “나도 참 겸손하자”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제 그 나이에 가까워지니 그것이 바로 제 기도가 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나를 지배하려 하고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은 내 모습을 봅니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기도 제목 중 하나가 있습니다. 흔히들 구원 받기 전이냐 후의 말씀이냐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구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 말씀이 오늘 새벽에 제게 주신 말씀이고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 자신의 죄악 된 참 모습을 바라볼 때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은혜’입니다. 그 이전에 은혜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주님 외에는 내가 나 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된 일들을 보며 정말 주님 은혜 아니고는 된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봅니다. 연약하고 모순되고 죄악 된 이런 내가 그것을 이기는 유일한 자리가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는 ‘80년 묵은 죄인이…’라고 하신 박윤선 목사님을 지금도 흠모합니다. 그것은 진실된 고백이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그 정도 나이가 되면 도통할 줄 알았습니다. 수도원의 성인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무서운 죄의 실제를 바라보며 은혜 안에 설 수밖에 없는 죄인 된 자신을 마주한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만 있으면 사단의 권세가 내게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은혜 밖에 있으면 내가 무슨 신학적인 업적을 쌓았든지 어떤 목회적인 사역에 성공했든지 넘어집니다. 그러나 연약한 내가 그 은혜 안에 있을 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하신 승리를 주신 주님 안에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그 은혜를 좇읍시다. 거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나야 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두 번째 해야 할 사역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하는 디모데야 충성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신학적으로 이것을 논쟁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 충성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일꾼 삼아 주셨다고 했습니다(딤전1:12). 사역의 원리는 충성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는 말씀(빌4:9)처럼 본(本)으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 충성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충성의 바통을 붙잡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다시 충성된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러면 그 충성된 사람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충성의 바통을 넘깁니다. 이 믿음의 경주가 기독교 2천년의 역사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 이 피스토스(πιστος)라는 단어는 피스티스(πιστις, 믿음)와 어원이 같지 않습니까? think나 thank가 쌍생어인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과 충성. 그런데 이 피스토스라는 말을 가장 장엄하게 사용한 호머의 오디세이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 반도에 있던 영웅들이 귀가하는 무리 중의 하나가 오디세이였습니다. 그가 탄 배는 제대로 가지 못해 유랑했고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시작은 거대한 풍랑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그 배를 칩니다. 또 벼락이 쳐서 돛대 한 쪽이 부러집니다. 비바람이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로 자꾸 부는 가운데 항해를 계속합니다. 선장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여! 당신은 내 배를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몰아가고 당신의 벼락으로 돛대를 부술 수 있고 집채만 한 파도로 내 배를 파손시키실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잡은 이 키에 ‘피스토스’하겠습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충성입니다.

충성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충성은 참으로 믿을 때에, 그 믿음의 표현으로 충성은 드러납니다. 충성 없는 신실한 믿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충성은 훌륭한 강의나 세미나로 절대 전해지지 않습니다. 책을 읽어서 형상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본으로만 전해집니다. 개신교의 비극은 삶의 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은데 닮은 사람은 드뭅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생성되는 영향력이 언제든 전달되고 주어져야 하는데 왜 신앙에 있어서는 그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지 말입니다. 학생 단체도 성경 공부를 하면 얼마 있다가 쉽게 그 영향력이 학생들의 한 평생을 만들어 버리는데, 왜 신학교에서는 아무리 가르쳐도 학생들이 변화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목회하면서도 왜 세속 목회자와 똑 같이 아무런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충성을 생각해 봅니다. 그분은 학문하는 데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잠언을 주석하실 때인데 간하배(Harvie M. Conn) 목사님이 말년에 책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지런히 사들였습니다. 언젠가 한 밤에 제게 박목사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홍목사님 그 잠언 주석 사셨습니까?” 그래서 “예 한 권 있어서 제가 가져왔습니다.” 했더니 “그거 좀 내일 꼭 한번 가져와 보여 주세요.” 하셨습니다. 그렇게 열정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박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홍목사님. 의사가 나보고 쉬라는데 쉬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래서 “목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했더니 “나는 쉬는 것이 말씀 연구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 말씀 연구이고, 누워도 말씀 생각인데 무얼 쉬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남의 책 살짝 베끼고 강의하는 것 말고, 정말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또 묵상하고 또 생각하고, 학자들의 글을 봐도 그냥 얼핏 보고 느낌 하나 받아 가지고 감상문 정도로 변형시켜서 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도 자기 학문 연구에 충성해야 진정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가 총회신학교 시절에 박윤선 목사님이 디모데서로 주경하시는 데 한 시간 내내 울었습니다. 말씀이 불이 되고 그 삶 속에 아름답게 통과되어서 내 영혼을 향해서 벅차오르는 그 어마어마한 말씀의 위력 앞에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올까 봤는데 입이 틀어져라 하나라도 더 집어넣어 주시려고 전심전력하시던 그 열정, 쉬는 시간이 되면 화장실에서 보이시지도 않고 바로 우리에게 와서 정확한 시간에 강의하시던 그 열정이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배우던 그 책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박목사님의 그 열정에 우리가 놀라고 그 충성에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충성스러움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박윤선 목사님을 기념하는 이 자리가 의미 있습니다. 오늘 신학교에서 충성되다 하는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목회자라면 책 몇 권 읽고는 ‘내가 책 몇 권을 읽었으니까……’ 하는 이런 목회에서 벗어나 주께서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해 전심전력으로 충성하고 새로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도 전심전력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똑같은 죄인일 뿐, 어떤 사람은 강대상에 있고 어떤 사람은 아래서 듣고 있다는 것은 다만 주께서 우리를 은혜로 세워 주셨음을 알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하나를 바로 증거하기 위해서 만일 부산에 책이 있으면 그 시간 부산까지 가서 그 책을 읽어 보고 확인하고 묵상하고 말씀을 전하는 정도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충성스러운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걸 놓치면 합신은 합신 되기가 힘듭니다.

우리 학교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학교 나온 교수가 정말 많습니다. 정보 전달 잘하는 엄청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먼저 생각할 일은 늘 은혜 안에 내가 거하고 있는가 이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저도 기도했습니다.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은혜를 주옵소서. 주의 은혜가 있을 때에 이것이 축복이고 주의 은혜가 빠지면 이 역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음에 떠날 때에 내가 주님께 충성했던 그 충성의 본이 전수되고 있는가를 생각합시다.

오늘 박윤선 목사님 30주년 기념대회입니다만, 이제 박윤선 목사님을 아는 세대가 지난 후에도 박윤선, 박윤선 그러지 말고 박목사님이 그처럼 사모했던 은혜와 박목사님이 그처럼 주님을 향해서 전심전력으로 헌신 했던 그 충성의 본을 지켜 우리의 것이 되게 합시다. 그럴 때 진정한 종교개혁은 우리 속에서 새로이 시작되리라 믿습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너무 귀한 스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가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의 간절한 원함이 없어 그분을 따라 살지 못했던 지난날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며 30주년 모임으로 섰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은혜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이 말씀을 우리 육신으로 보여 주지 못한 이 누추함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도 그처럼 박목사님이 사모했던 은혜를 늘 구하는 이 자리에 복을 주옵소서. 그리고 그렇게 충성할 때 내 충성이 바통을 이어가도록 거룩한 성령님의 역사를 이 시간 이 자리에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