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민주 시민인 그리스도인은 방관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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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민주 시민인 그리스도인은 방관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난점도 있지만 역사상 가장 질서 있는 체제라 할 만하다. 각국의 민주주의 확립 과정은 예외 없이 지난했고 우리나라도 우여곡절 끝에 오늘의 민주 국가를 가꾸어 왔다. 이런 행로에서 뚜렷해진 민주주의의 핵심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이다. 그런데 국가의 규모에 따라 대표자들을 선출하여 통치를 대신하게 하니 대의 민주주의라 하고, 일반 시민이 권리를 갖고 국가 운영과 의사 결정에 참여하므로 공화국이라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며 우리는 이 체제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

  민주주의가 완전하진 않아도 인간의 평등함과 존엄성을 담지한 성경적 가치에 상대적으로 근접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민주 시민으로서도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권리를 누림과 함께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의 가치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감시, 선도하며 발전시키는 책임을 잘 감당함을 말한다.

  민주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삶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무감각, 무관심을 포함한 방관이다. 방관은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포기하는 무기력의 총화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악과도 같다. 예컨대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한 일과 서슬 푸른 독재 정권 아래 인권이 말살되고 민주주의가 무색해질 때 시국을 방관하며 몸을 사렸던 것은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또 근자의 4대강 사업의 오류와 폐해에 대해 무반응으로 방관했던 일도 있다. 보다시피 4대강 곳곳에서 부작용이 발생하는 지금도 당시의 책임자들 중 심각하게 반성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이렇게 귀결된 이유는 다수 국민들이 경제적 이익이 있을 거란 당국의 감언이설에 혹하여 그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니 생명의 존엄성이니 더불어 사는 사회니 외쳐도 별 반향이 없었다. 후손들의 삶과 미래가 달린 문제인데 응당한 슬픔과 분노도 없었다. 여기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감각과 반응을 가져야 한다. 러시아의 저항 시인 네크라소프는 “슬픔도 분노도 없는 자는 이미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격동의 한국사를 돌아보면 광복 이후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가르치고 입만 열면 나라 사랑을 외쳤으나 민주 국가라던 이 나라의 근본적 오류에 대해 진정한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애국심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던 독재 정권 때 수차례의 항쟁이 있었지만 오류의 진정한 교정은 선입관과 기득권층의 끈질긴 반작용 앞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 사실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신앙인의 삶과 정치의 분리로 혼동하였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정치적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인정하지 못하니 깊이 파고든 이원론적 신앙은 이 땅에서의 삶을 염세적으로 이끌고 그저 교회의 유익만 유지된다면 아무래도 괜찮다는 소극적 사고와 행동에 점점 갇히게 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이 땅의 시민이기도 하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시공간에서 시민으로서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모두가 정치가가 되고 정당 활동에 앞장서라는 말이 아니다. 민주 사회의 일원인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기초인 선거를 비롯한 정치적 결정과 정의로운 국가 운영 과정에 적극 참여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능동성을 저해하는 교회 내적 굴레를 신앙의 이름으로 자가제작하고 있던 점을 똑바로 성찰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시칠리아의 팔라리스 왕은 거대한 놋쇠 황소를 만들게 했다. 그곳에 정적들을 집어넣고 그 밑에 불을 때면 고통의 울부짖음이 황소 목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오며 소울음 소리처럼 들리는데 왕과 귀족들은 이것을 즐겼다. 여기서 끔찍한 것은 억울한 사형수가 있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당대의 무감각이다. 어느 시대건 부정과 부조리에 희생당하는 누군가의 단말마적 부르짖음에 그저 방관자요 구경꾼으로 지낸다면 우리 또한 은연중 놋쇠 황소를 즐기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잔인한 군상일 뿐이다.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8)는 유명한 ‘방관자를 꾸짖는다.’는 글에서 여섯 가지 유형의 방관자를 꾸짖었다. 세상사에 무관심, 무지하여 자기 세계 안에서 무념으로 살아가는 혼돈파(渾沌派), 나라가 망해도 자기 이익이 없으면 안 나서는 위아파(爲我派), 뒤에서 비웃으며 욕과 비판만 해대는 소매파(笑罵派), 어쩔 수 없다고 핑계 대며 상투적 탄식만 늘어놓는 무능한 오호파(嗚呼派), 남에게만 의지하며 자기 결정을 포기하고도 ‘나 하나쯤은 괜찮다.’는 포기파(抛棄派), 시류에 편승하며 이익의 때를 기다리는 기회주의 대시파(待時派). 이 중에 혼돈파를 제하면 나머지는 책임을 알고도 회피하는 비열한 방관자라는 오명의 부류들이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혹시 방관자의 어느 유형에 들어 있지는 않은가.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뒷전에서 수수방관하는가. 왜 누군가가 애써 이루어 놓은 민주적 성과들의 혜택만 뒤따라가며 손쉽게 누리려 하는가. 히틀러를 방관했던 독일 교회의 뼈저린 회개를 생각해 보라. 남북 관계를 포함한 역사적 격변기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과 이 나라의 정치적 현안을 분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자문해 보라.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방관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