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혐오와 갈등의 시대에 답해야 한다

0
111

사설

혐오와 갈등의 시대에 답해야 한다

 

  가히 혐오(嫌惡)의 시대인 듯하다. 여혐, 남혐, 극혐 등 혐자가 붙은 신조어들이 넘쳐난다. 또한 한남충, 무뇌충, 틀딱충, 일베충 등 혐오의 대상을 집약 상징하는 충(蟲)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된다. 이는 사람을 해충 취급하는 혐오의 극한 표현이다.

  혐오란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개인의 호불호와 기호에 따라 혐오와 애호의 대상이 따로 있을 수는 있다. 사람마다 분노의 근거와 대상이 다르기도 하고 공분의 사건을 접할 때는 미움이 싹트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분노가 보편적인 윤리와 동떨어진 정의롭지 못한 혐오로 발전하고 나아가 집단적 행동으로 나타날 때 사회의 갈등은 깊어진다.

  혐오가 발생하는 근원은 기저의 가치관의 상이함과 이익의 대립을 통한 갈등 관계이다. 대부분의 혐오의 뿌리에는 갈등과 분노의 감정선이 있다. 따라서 혐오는 다분히 로고스를 벗어난 파토스의 영역에서 심화된다. 그러나 파토스가 에토스를 동반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혐오가 자신의 내면에서 정리되지 못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윤리적 한계를 넘어서면 공격적 혐오의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것이 동조자를 얻고 확장되면 광기 어린 나치즘과 일본의 혐한 운동이나 네오나치즘, KKK단의 인종 혐오와 같은 집단적 혐오 주체 세력으로 발전한다. 여기에 한 사회와 국제 관계의 갈등과 불안이 심화되는 메커니즘이 있는 것이다.

  2년 전의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혐오에 대한 담론이 봇물 터지듯 넘쳐났다. 또한 최근 여성에 의한 남성 누드모델 사진 유출 사건을 통해 동류의 사건들에 대한 경찰력과 법 집행의 남성 편향성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이 극에 달해 있다. 이는 자연히 페미니즘을 자극하였고 남성 혐오의 혐의를 지닌 워마드의 활동을 부추기기도 했다. 미투 운동에 대한 오해를 비롯하여 이것은 양성 간의 첨예한 갈등과 혐오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비단 양성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는 갈등으로 점철된 길목에 휘말려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 사회 갈등 지수는 2009년-2013년에 평균의 1.5배로 29개국 중 7위였다. 2016년 조사로는 34개국 중 멕시코, 터키에 이어 3위였다. 촛불 정국을 거치고 정권이 교체된 격변기의 사회적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 지수는 너무도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2017년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방안(4)-사회문제와 사회통합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은 10명 중 8명이 한국 사회가 심각한 갈등 속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85.2%,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 81.9%, 노사 갈등 81.7%, 빈부 갈등 79.8% 등의 사회 경제적 갈등은 80%가 심하다고 보았다. 이어진 갈등 관계는 다문화 갈등 49.9%, 개발과 환경보호 갈등 60.9%, 세대 갈등 58.1%, 지역 갈등 57.8% 등이었다.

  이런 상황에 한국 교회와 우리 교단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것은 갈등을 치유하자는 단순한 슬로건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회의 정책적 실천성의 문제이다. 교회는 동시대의 여러 갈등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부단히 모색하고 내놓아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영적’인 영역으로 봉인해 버리고 마는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오래 전에 클라우스 보크무엘(Klaus Bockmuchl)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과 기독교회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심각한 혐오와 갈등의 문제에 어떤 생각의 정리를 하고 있으며 대안을 갖고 있는가?

  “모든 해답은 성경에 있다.”는 언표만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한 것이라 강변할 수는 없다. 여러 사회적 갈등, 특히 혐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사회 혼란을 견인하는 결과론적 악역을 담당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 구조에 있어서의 신자들의 올바른 선택과 태도이다. 태도라 함은 마음 즉, 가치관과 그것의 외적 행동 양식까지를 아우른다. 무비판적 혐오를 정당화하는 자들이 파워를 형성하고 여론 몰이와 여론 조작도 불사하면 그 혐오가 개인에서 끝나지 않고 집단적 힘을 갖게 되어 더 큰 혼돈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사회구조적 혐오와 갈등의 오류를 무너뜨리는 노력, 그건 열정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특별히 우리 교단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권고한다. 혐오와 갈등을 포함한 우리 시대의 핫 이슈들에 대한 담론을 조속히 활성화하고 집담회나 기고문 등을 통해 성경적이고 실제적 매뉴얼을 제시하는 열정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우리에겐 갈등 해소의 실천적 방법들을 강구하며 실행하는 전방위적 자세가 필요하다. 기독교 윤리마저 그 준거점이 다변화되는 시대에 사건과 사물을 보는 렌즈의 불투명성이 우리의 당위적 책임을 막고 있지는 않는가.

  유명한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떠올려 보자.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하나 됨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그러나 이 기도는 그렇게 실천하려고 애쓰고 행동하는 자에게만 더 실효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