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 2018 개강심령수련회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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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 2018 개강심령수련회 설교 요약

< 장상래 목사_은평교회 원로>

1. 첫날 개회 _ “사모하는 마음” (시 107:8-9)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만두라. 1980년도에 교회를 개척할 당시는 성령의 불을 외치는 시대였다. 그 시대 성도들이 성경을 알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칠판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 길을 가는 데 중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이다. 사모함이 없는 목회자가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사모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사모함이 목회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사모한다는 말은, 뛴다라는 말에서 파생되었고, 뛴다는 것은 갈망하는 것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사모함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다.
  첫째, 구원.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가치를 어느 정도 두는가를 통해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인생의 행복을 나타낸다. 진정한 사람의 행복은 구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구원에 대한 가치를 알면 헌신과 충성이 나타난다.
  둘째, 재림. 구원과 더불어 크게 사모해야 할 부분이다. 지금이 종말의 마지막이라고 많은 역사신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일어날 사건이다. 재림은 심판,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의 우주적인 재림을 늘 사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죽음으로 만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그대로 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성경의 많은 약속들이 성취되었다. 그리고 남은 생생한 약속이 바로 재림이다.
  재림에 대한 사모함은 욕심을 버리게 한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욕심이다. 재림에 대한 의식이 강할수록 경건과 거룩이 나타날 수 있다.

  2. 첫날 저녁 _ “하나님의 형통” (창 39:20-23)

  요셉이 하나님의 형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형통의 개념은 세상에서의 개념과 다르다. 첫째, 그것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가정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며, 그 형통의 내용은 5절에서 말한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은 가정적으로,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계모가 3명, 이복형제가 10명이 있었고, 형들로부터 미움과 시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입에 원망이나 불평이 없는 것을 본다. 나중에는 팔려서 이방 나라의 종이 되기까지 한다. 종이 된 그를 통해 보디발의 가정이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디발이 복을 받으면 그 종들은 일이 많아지고 피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씀하신다. 형통한 자는 남을 해하지 않는다.
  둘째, 죄를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통은 죄와 크게 관련이 있다. 죄를 못 이기고도 그 결과물이 화려했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향해 성공했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형통한 자가 아니며, 속고 있는 자이다. 위장되어 있다. 죄를 이기는 자가 형통한 자이다. 오늘날은 거짓말을 쉽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굉장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것이야말로 거짓이다. 양심이 살아있어야 한다.
  셋째, 점점 잘되는 것을 말한다. 요셉은 감옥에서 인생을 끝내지 않았다. 감옥에서 도 믿음을 지키며 기다렸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가뭄에 처한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들이고, 큰 민족을 이룬 결정적인 순간에 서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직 최후의 날이, 우리 앞에 있다. 점점 더 잘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줄 믿는다. 그렇기에 낙담을 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그렇기에 신앙인들은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3. 둘째 날 아침 _ “하나님의 본심” (애 3:33, 렘 29:10-13 참고)

  하나님의 본심은 하나님의 참된 뜻, 참된 의지를 뜻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들을 복주시기를 원하셨고, 반드시 복을 주시고, 결국은 복이 되게 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심을 여기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고 결국은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신다. 어떻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가? 첫째, 기다리라. 애3:25-26. 유대가 귀환을 하려면 70년이 걸린다고 예언하셨는데, 그 70년을 기다리라고 하신다. 목회는 기다림의 싸움이다. 이 백성들이 낙담했던 것은 ‘그 70년을 어떻게 기다리겠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으로 가기도 했다. 신앙생활 역시 많이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것은 영원히 멸망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계획이 있으실 것이다.
  둘째, 순종하라. 이방으로 이민도 가고 저항도 하고 낙담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아니다. 포로로 끌려갈 때, 순종하던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데,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쉬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항상 어려운 것을 요구하신다. 순종은 쉽지 않다.
  셋째, 기도하라. 일단은 하나님 앞에 구하라. 대상4:9-10. 야베스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었다는 사실로 보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버지가 없다보니 집이 어려웠다. 그런 그는 주님 앞에 간구했고, 주님은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4. 둘째 날 저녁 _ “살아남은 자” (창 5:21-24)

  창5:1. 이 부분은 아담의 계보로 5장에서 시작하여 7장에서 다 죽는데, 죽지 않는 두 사람이 에녹과 노아다. 두 사람은 요행수로 살았을까? 아니면 살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목회라는 것은 요행으로 잘 되지 않는다. 에녹은 65세까지 평범하게 산다. 그리고 65세에 므두셀라를 낳는다.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에녹은 인생의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창 잡은 자’이다. 미국 성서신학대학의 존펠이라는 사람은 이것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창 잡은 자가 죽는 날에는 그 마을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이 노아를 낳았다.
  창 잡은 자 므두셀라가 죽는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다. 또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그 때는 므두셀라 나이가 369세였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창7:6). 노아 나이 600세때 보면 므두셀라는 969세였다.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27). 므두셀라가 죽는 날이 대홍수 사건이었다. 에녹은 그의 죽는 날을 평범하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유 1:14-16. 여기서 보면 에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예언했다. 즉 심판을 예언한 것이다. 에녹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 암시적인 것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에녹은 그 이후 삶이 바뀐 것이었다.
  이번에 노아를 살펴보자. 노아는 목축업을 했던 자였다. 그런데 480세 때 방주 짓는 자로 대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120년 지난 후 대홍수 사건이 일어났다. 성경은 노아의 주변인물을 설명하는데,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다. 노아도 먹고 마시고, 결혼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노아는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방주 짓는 목적을 위해 다른 것은 수단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수단이 목적이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과 별다를 바가 없지만 반드시 달라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다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수단과 목적이 혼선이 와서 무엇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하는지, 왜 신학을 해야 하는지를 찾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행동해야 한다. 에녹도 암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언자적 삶을 산다. 노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산다. 우리도 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문서, 즉 성경을 받았다. 육성보다도 분명하고, 암시보다 확실한 메세지를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왜 행동하지 못하는가? 말씀을 들었다면 행동해야 한다. 피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문서화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심판을 말해야 한다. 암시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에녹은 그것을 예언했다. 교회는 원색적인 복음이 필요하다. 안 믿는 가족들을 보고 왜 심판을 말하지 않는가? 마치 심판이 없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임을 열어 말하라. 천국이 있는 것을 말하라. 천국이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왜 그렇게 침묵하는가?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심판이 있음을, 천국이 있음을 에녹처럼 말하라. 신령한 눈을 뜨고, 죽어가는 영혼을 향하여 심판을 말하라.
  둘째, 심판을 준비하라. 에녹은 심판을 예언했다면, 노아는 그 심판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그래서 결국 노아와 그 가족들은 살아남게 되었다. 심판을 말할 뿐 아니라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 외치고 구체적인 준비해야 한다. 점점 경건에 이르고, 점점 거룩해지고, 점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5. 셋째 날 폐회 _ “최고와 최상의 가치” (골 1:24-25)

  1. 설교 : 목사는 설교를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인을 무시하는 것이다.
  2. 교회(예배, 주일) : 교회를 위해 평생을 내어놓을 만큼 전념하라.
  3. 사는 것 : 목사가 교인들을 가장 잘 섬기고 가장 크게 섬기는 것은, 설교한 대로 사는 것이다. 설교하고 숨는다면, 그것이 더 쉬울 수 있다. 성도들은 말씀을 듣고, 목회자를 본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보여 주어야 한다.
  4. 영혼 : 사람을 무시하거나 사람을 소홀히 하거나 사람을 귀찮게 여기는 의식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요약 _ 합신재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