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성경적 권위에 대하여_박동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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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단

성경적 권위에 대하여

< 박동근 목사_안양한길교회>

 

성경적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위탁된 성격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권위는 결코 “권위주의”, “권력 남용” 등과 동일시될 수 없다

부모, 위정자, 교회에 위탁된 권위를 하나님께서 위탁한 목적과 성격을 넘어서지 않게 겸허히 수행해야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둘러본다면, “권위”에 관련된 주제가 큰 갈등과 상처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 목사와 성도들, 위정자들과 시민들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과 상처들은 상당부분 권위에 대한 “남용”과 권위에 대한 “경멸”로 연결된다. 한국 사회 안에는 부정할 수 없는 양극화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에서는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한편에서는 “탈권위”가 팽배하다. 일제 식민지와 지속된 정치적 독재 상황에서 시민들은 건전한 “권위”를 별로 경험해 보지 못한 듯하다. 한편 극적인 민주화 시대를 맞아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명하게 사회 전반에 표명된 듯하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사회 발전과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통틀어 건실하고 건전한 “권위”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기보다는 과거의 “권위주의”와 “권위에 대한 경멸”이 사회 곳곳에 혹은 한 개인들 정신 속에 공존하고 있는 듯싶다. 권위주의와 권위에 대한 경멸이 공정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로 표명되고 어떤 실천적 영역들 속에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공동체 안에, 한 개인의 정신과 실천 안에 부재한 “권위” 철학의 자리를 “권위주의”와 “권위에 대한 경멸”이 점유하여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이 주제와 관련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필 필요가 있다. 그 어느 곳보다 모범을 보여, 빛과 소금이 된 교회들이 “권위”의 영역에서 빛을 발하고 맛을 내어야 할 터인데, 현실은 교회 속에 권력의 남용과 권위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위의 문제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성경과 개혁교회 신앙유산을 정성들여 살핀다면, 우리가 직면한 “권위”의 문제를 해결할 많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성경과 개혁교회 신앙유산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건실한 “권위관”을 풍요롭고 건실하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과 개혁교회 신앙의 유산들이 “권위”에 대하여 어떤 이해와 실천관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권위주의”와 “권위에 대한 경멸” 혹은 “탈권위적 태도”라는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권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는데로부터 시작하리라 본다. 즉, 하나님께서 권위를 무엇으로 규정하시며, 참된 권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먼저, 성경은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의 기원을 강조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권위는 결코 “권위주의”, “권력 남용”과 같은 것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여야 한다. “권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다. 그러나 그 권위는 독재나 자신의 이권 취득의 수단과 같은 것과 거리가 멀다. 성경에서 권위는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지만, 이 권위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위탁된 성격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해주신 십계명의 제 5계명은 바로 이 권위의 본질을 다룬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유산들은 이 소중하고 존귀한 제 5계명을 권위의 문제와 관련하여 성실히 전하고 있다. 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계명은 인간의 상하 위치에 있는 자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계명을 이렇게 규정한다. “이 계명의 목적은,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경륜이 유지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그가 정하신 상하 등급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공손히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남보다 높은 자리에 세워진 자들이 마땅히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회는 제대로 유지되기 어렵다.”(John Calvin의 출애굽기 20:12절 주석) 이처럼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를 베푸신 하나님의 목적을 더 강조하지 않는다면 권위는 “권위주의”나 “권력 남용”과 혼동될 수 있다. 권위에 관련된 계명을 “부모”를 통해 제유법적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권위 아래 서는 것을 싫어하는 본성이 있어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가르치시고자 권위자 중에 가장 긍정적인 대상인 부모를 든 것이다.

  부모의 권위는 권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모범이다. 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권위를 “권위주의”와 “권력 남용”과 같은 왜곡된 모습과 동일시할 때가 많은데, 실제 권위의 행사는 공동체와 권위 행사를 받는 대상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의 권위는 철저히 자녀들의 보존과 양육에 직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권위를 주신 것은 자녀들을 낳아 키우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복리를 책임지는 의무의 이면과 같은 것이다. 부모에게 권위를 주셔서 자녀는 부모의 보살핌과 훈육 아래 놓여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부모의 권위는 자녀를 양육하고 훈육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하는 것들이다. 부모에게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은 부모에게 많은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의미이다. 부모는 가진 권위로 자신을 소진해 자녀들을 양육하고 보호하고 훈육한다.

  위정자들은 어떠한가? 이들의 권위도 하나님께 위탁된 권위라 할 수 있다. 위정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위탁받았다는 것은 위정자들이 시민과 공동체를 위해 의무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정자들의 권위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시민들의 질서와 안전과 복리를 위하여만 사용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익은 법이 정한 대로 사회가 합의한 합법적 수단 안에서만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오로지 시민과 공동체를 위해 봉사의 의무를 다할 때만 정당하다.

  교회의 권위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수평적 연합체”라는 직분을 주셔서 교회를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이 권위도 오로지 성도들과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영적 성격을 가진 봉사적 권세이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므로, 장로는 목사와 함께 치리함으로, 집사는 재정을 관리하고 구제에 힘씀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다. 이들의 권위는 의무와 봉사의 권한으로 바꾸어 불려 질 수 있다.

  이러한 “위탁된 권위”가 성경적 권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권위도 자신의 이권을 향할 수 없으며, 어떠한 권위도 하나님께서 권위를 위탁한 목적과 성격을 넘어선 무소불위의 권위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권위는 이 목적과 성격의 한계 안에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합법적 복종”(John Calvin, 기독교 강요, I. 8. 35)이란 말을 썼고,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정당한 한계”(Zacharias Ursinus,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라는 말로 권위를 한정했다. 모든 권위는 성경에서 규정한 권위의 목적 아래 있으며, 모든 권위는 권위가 지운 의무 이행 아래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며, 말씀과 각 공동체의 합의된 합법적 법규 아래 제한을 받는 권위로서 무소불위의 권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는 존재적 권위라기보다는 기능적 권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하나님의 권위는 누구에게도 제한 받지 않는 무한 권세요 절대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는 위탁된 권위요 하나님의 법과 사회 법 아래 제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부모들은 부모의 의무와 사랑을 다할 때 그로부터 자녀의 공경과 존경을 받는 것이며, 위정자들은 헌법을 수호하고 백성들의 질서와 안전과 복리를 위해 헌신할 때 그 권위가 존경을 받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같은 위탁된 권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법 아래서 섬김의 봉사를 감당할 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위탁된 권위는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의 합의된 질서와 법 안에서 제한을 받는 “권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공동체를 위해 위탁된 권위로서 의무의 성격이 짙음을 인식하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권위 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이들이 공동체를 위해 합법적인 봉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권한을 인정해주고, 그 권한이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인식해 존경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권위를 가진 자는 의무를 더 생각하고, 권위의 행사를 받는 이들은 권한을 존경하는 것이 권위적 성격으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 본다.

  권위와 관련하여 상처가 많은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가 권위주의와 권력 남용 그리고 권위 경멸 내지 탈권위를 넘어서서 성경적 권위 인식과 실천의 회복으로 회복되길 기도한다. 공동체에 존경할 만한 권위가 건강히 나타나서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권위가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왜곡된 권위주의로 말미암아 불신주의에 깊이 빠진 한국 교회와 사회에 신뢰할 만한 권위, 사랑할 만한 권위, 존경할 만한 권위가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한국교회는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로마서 13:1을 악용하거나 남용하지 말아야 하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의도하셨던 권위의 의미와 실천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