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강좌>
‘믿음’을 아시나요?
< 조병수 교수, 전 합신총장_신약학 >
믿음은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믿음은 지식으로 안정되고, 감정으로 강렬해지고, 의지로 생동감을 가진다
진정한 믿음은 의심과 불신, 과신과 맹신에 맞서 싸워야 한다
열매 맺는 믿음은 내게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이 심어 주신다
여는 말
내가 매일같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입니다. 때로는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에서, 때로는 신학교의 교정에서, 때로는 특정한 목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단체들에서 늘 신자들을 만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고, 대부분의 화제로 신앙의 테두리에서 맴돈답니다.
어떻게 예배를 바로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등등의 아주 경건하고 신앙적인 대화가 날마다 우리의 입술에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기독교의 삶을 살면서도 막상 모든 기독교 생활의 바탕이 되는 믿음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중세시대에 평범한 유럽 사람들이 융성한 기독교의 문화 속에서 살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날도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삶을 누리지만 실제로 믿음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무덤덤하게 살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던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는 이때, 과연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반대로 믿음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마치 흰 색을 설명하려면 흰 색 그 자체의 속성을 나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동시에 흰 색이 아닌 다른 색들과 비교함으로써 흰 색을 설명하는 것도 방법이 되는 것처럼, 믿음인 것과 믿음 아닌 것을 둘 다 설명하는 것은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1. 믿음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만큼 많이 나오는 것도 드물 것 같고, 믿음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나면 성경에 별로 남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결국 구약성경의 전체 요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거지요.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도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막연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은 이런 막연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 대답을 찾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히 12:2)라는 겁니다.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믿음의 시작자이며 종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시작하는 분이며 동시에 믿음을 종결하는 분입니다. 세상에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만이 진정한 믿음의 총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셨습니다.
이런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주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심지어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을 때, 믿음이란 믿는 대상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태도가 아니라 관계라는 말씀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 딱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었고, 오직 하나님 은혜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인물들 가운데 다니엘이 대표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니엘은 다리오가 통치할 때 사자 굴에 던져지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성경은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 다니엘은 당시에 수석총리였기 때문에 사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자신의 불리한 상황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처신을 하였습니다(단 6:10).
도대체 이런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믿음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각오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믿음은 수련을 통해서 생각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은 사람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사람의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먼저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우리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분석해보면 두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안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게 있고, 믿음의 바깥쪽에는 사람이 드리는 게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전에는 믿어지지 않던 것이 신기하게도 믿어지는 것이지요. 믿음은 사람의 반응이기 때문에 믿는 것을 더욱 잘 믿는 데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음은 받아들임이며 동시에 내어드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의 인생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요소
그런데 믿음은 세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답니다. 그것들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지정의라는 세 요소가 조화롭게 잘 어우러질 때 바른 믿음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모자라면 믿음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기우뚱거리게 되며, 심지어는 아주 볼썽사나운 모양을 가지고 맙니다. 지식은 믿음을 안정되게 만들고, 감정은 믿음을 강렬하게 만들고, 의지는 믿음을 살아있게 만듭니다.
지식 없는 믿음은 무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지식과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만, 믿음은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병행할 때 견고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아주 불안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궤라는 물체에 대한 신앙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말씀은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하여 많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는 큰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감정 없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감정을 유발시킵니다. 믿음은 감정과 연결될 때 폭발적이며 열정적이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같이 뜨겁게 타올랐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와 달리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믿음과 관련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의지 없는 믿음은 주저하는 믿음입니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눈치만 보는 것은 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옛날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나라의 영적 상태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의지로 표현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단력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라는 요소를 가지면서, 각각의 요소를 절묘하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안정되고, 감정으로 강렬해지고, 의지로 생동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세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할 때 놀라운 열매를 맺는답니다.
3. 믿음의 반대
이제 이야기를 방향을 바꾸어보겠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았으니, 이제는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믿음 아닌 것들이 포진합니다.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것이 의심과 불신입니다. 의심은 믿음에서 조금 멀고, 불신은 믿음에서 아주 멉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것이 과신과 맹신입니다. 과신은 믿음에서 조금 멀고, 맹신은 믿음에서 아주 멉니다.
불신 ← 의심 ← 믿음 → 과신 → 맹신
불신은 사람이 자신을 믿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믿음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의심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은 되어 있으나 자신의 주관이 약해서 늘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의 설명을 따르자면 두 마음을 품고 있어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가고 말았던 베드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과신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나 자신의 주관이 강해서 성급하게 덤벼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 아이 성과 전투할 때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이 저질렀던 실수를 연상시킵니다(물론 아이 성 패배의 원인에는 아간의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지요).
맹신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절대로 맹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임신이라는 사건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불가능한 것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데 불가능한 것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의심과 불신에 대하여 싸워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과신과 맹신에 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의심과 불신보다는 과신과 맹신이 더 간악하고 무서운 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의심과 불신은 쉽게 판가름되지만, 과신과 맹신은 굉장한 믿음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의 결과
이제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집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신자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고백하게 된답니다.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외친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일을 오래 한 후에 내린 결론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딤전 1:15).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스스로를 쓸모없는 자라고 여기며 무익한 종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이 점점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은 정지하고 하나님이 활동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한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시계의 바늘은 제 힘으로 저절로 도는 것이 아닙니다. 태엽이(오늘날에는 배터리가) 작동해야 시계 바늘이 도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절대로 믿음이 시작될 수 없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밖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실 때, 그 믿음이 씨앗처럼 자라서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무덤덤하게 살 수는 없겠지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진정한 신자로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 백부장에게 탄성을 발하시며 주셨던 말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면 얼마나 복 될까요?
– 이 글은 “개혁주의 생명신학으로 세상 읽기” 2017년 봄호에 실렸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