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10>| 육체 아래로 ‘스스로’ 들어간다_김근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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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 아래로 ‘스스로’ 들어간다  

갈라디아서 3장 1-5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육체의 일은 성령의 일을 방해하고 추락시키는 수고일 뿐”

 

 

  1. 들머리(발단)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즐기라고 허락한 재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엡1:3) 것을 성령을 사회자로 세워두고 노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놀이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롬12:1) 예배(성찬)이다.

   이게 재미있을 놀이인가? 어쩌면 경건하게 짓누르는 듯한 의무일 것이다. 성경이 가장 힘주어 말하는 교훈으로 어찌 놀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의무(duty)로 어찌 즐길 수(웨민소요리 제3문) 있겠는가?

   이런 교훈과 의무를 이 정도 경지에서 재미로 노는 사람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오직 하나님께 영광’(웨민소요리1문)을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서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게 이루어내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을 ‘절대 고수’라고 한다.

 

  1. 주제(전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와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갈3:3) 일을 하고 있다고 혼내고 있다.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령의 일과 육체의 일’의 재미와 결과를 말해 놓는다. 한마디로 성령의 일은 자유롭게 놀면서 신령한 열매(하나님께 영광)를 맺게 한다. 반면에 육체의 일은 죄에 곧 사탄의 손아귀에 속박된 채 들어간 것을 모르고 제 육체의 만족을 추구한다.

   성령께서 사회를 보고 함께 노는 일은 고귀하고 완전하고 자유로운 즐김이라고 말하고, 제 육체를 사회자로 놓고 노는 일은 비천하고 불완전하고 텅 빈 즐김이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사회를 보며 주려는 즐거움은 칭의의 고귀한 목적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갈5:1)을 이루는 데까지 여러분을 끌고 가는 수고이다. 반면 육체가 보는 사회는 성령의 일을 방해하려고 여러분을 반대 방향으로 데려가서 추락시키는 수고일 뿐이다.

 

  1. 전개(위기)

   제 육체의 만족을 억압된 채로 텅 비게 채우려고 노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또는 그런 식으로 놀고 싶다고 목적 삼아 노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자유롭고 완전하게 방해 받지 않고 놀려고 한다. 부모라도 목사라도 성령이라도 누가 옆에서 간섭하는 것을 속박으로 본다. 이런 사람을 ‘어리석고 쪼잔한 절대 하수’라고 한다. 그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갈5:21).

 

  1. 증거(절정)

   그 뻔한 결과를 아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마음을 쏟았다. 다시금 쏟는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 것은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입니다”(갈3:5).

갈라디아교회가 받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 주셨습니다”(갈1:4)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복음이 갈라디아교회 사람들 눈앞에 분명히 있다(갈3:1)고 한다. 또한 우리들도 받아 우리들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는 복음이다.

 

  1. 마무리(결말)

    우리들 눈에 들어있는 이 복음 때문에 갈라디아사람들처럼 육체(율법)의 꼬임에 다시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복음 위에 율법(육체놀이)을 얹고 싶은 ‘그 재미, 그 환상’을 전혀 재미 보지 않을 자제력이 있는가 말이다.

   성령께서 열심히 사회를 보시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거나 딴 짓 하면서 협조 안 하는 인간들이지 않을까?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눅7:32)는 책망을 받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