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방언’이 추구하는 비성경적 요소들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교회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시어 완성하신 모든 계시인 성경을 벗어나거나 넘어설 수 없어”
한국의 개신교 신앙에서 ‘방언 추구’는 광범위한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장로교회들에서도 추구되거나 권장될 정도로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특별히 선교단체나 초교파적인 사역을 추구하는 단체들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방언기도를 부추기고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방언과 관련하여서 흔히 고린도전서 14장을 가장 강력한 증거본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고전 13장 1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γλώσσαις)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전제하였는 바 이미 은사의 바탕이 은혜이며 섬김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방언을 추구하며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조차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방언과 각종 은사들을 이미 전제(前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방언이 분명히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타의 다른 성경구절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다가도 이러한 특정한 본문에 대해서는 의미상의 해석을 꾀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해석을 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방언을 추구하는 자들의 신앙을 보면 반드시 연계되는 것이 바로 은사(χάρισμσ)의 사모함이며, 그들은 완곡하게 기도 응답이라고 말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비밀한 계시를 사모하게 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흔히 말하는 ‘직통 계시’의 경지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방언기도란 결코 한 방향, 즉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만으로 추구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서 피드백(feedback)하는 과정에서 ‘예언’ 혹은 ‘직통계시’의 단계에까지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전 13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언(προϕητεία)을 언급하면서도, 9절과 10절에서 이르기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함으로써 13장 1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2절에서 언급한 예언 등이 모두 부분적이며 불완전함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도가 권면하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을 말씀(λογος)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눅 24장 44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시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 24:45) 하셨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성경)을 향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모든 부분적인 예언과 계시가 폐해지고 오직 성경만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로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계시를 추구하는 은사자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들의 증인(눅 24:48)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서 일탈한 대부분의 이단들이 추구한 것이 바로 방언 추구의 배후에 있는 소위 ‘계시의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은 단순한 음절의 반복을 통한 무아지경에서의 신비적인 현상들의 경험들과 그 가운데서 얻은 신비적 지식들의 신빙성이 계시의 연속선상에서 보증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단들이 그 도덕성에 상관없이 결국에는 방언기도와 같은 것을 통해 신비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방언기도를 추구하는 신앙은 반드시 신비주의적인 자연신학, 곧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기반을 두는 신학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 예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글을 모르는 마호멧이 유일신관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유대교와 구약 외경, 그리고 신약시대 이단분파들의 불완전하고 허구적인 기록들을 통해 왜곡된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받았다는 직통계시 가운데 완성한 것이 바로 쿠란(quran)이다.
또한 그러한 쿠란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슬람 신앙 가운데서는 탁발수사들이 ‘알라, 알라’라는 단순한 단어를 끝없이 반복함으로써 황홀경에 빠진 채로 벌이는 갖가지 이적적인 기행들은, 현대 개신교의 은사주의자들이 추구하며 보여주는 기이한 일들과 전적으로 닮아 있다.
이처럼 방언기도는 단순히 기도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거나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그 깊이 가운데서 예언과 계시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에서 그 폐해가 크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시어 완성하신 모든 계시인 성경을 벗어나거나 넘어서게 하는 것들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후손들인 개신교 신자들이 취할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에서 끊어낸 것은 성경의 진리 이외의 모든 미신과 우상숭배와 자연종교적인 잔재들과 폐해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방언이니 은사니 하는 대부분의 현상들이라는 것은 사실 버려진 쓰레기 조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