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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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보편교회에 대한 의식은 개신교회가 가진 기본적인 인식이며, 진정한 의미의 보편교회, 혹은 공교회는 개신교회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 혹은 “거룩한 공교회”라는 문구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서 보편교회를 믿는다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보편교회에 속하는 것을 믿으며 추구한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교회에 관한 신앙에 있어 한 가지 오해가 있다. 그것이 바로 보편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로서의 개신교회는 기본적으로 ‘초교파적인 교회’를 표방한다고 생각하는 오해다.

즉 보편교회로서의 우주적인 교회이기도 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 개신교회는 항상 모든 교파들을 아우르는 초교파의 교회였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공교회, 즉 보편교회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서 발생한 오해이다.

왜냐하면 공교회를 ‘우주적인 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교회는 수많은 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좀 더 엄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오직 하나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이라는 단어를 더하여 “거룩한 공교회”라고 사도신경을 통해 하나인 유일한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개신교 신앙의 교회관이다.

이런 교회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인 우주적 보편교회, 즉 공교회가 가시적으로 이 지상에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곧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오직 하나인 그 교회가 어떻게 수많은 지상의 교회들로 구현되어 가시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기본적으로 보편교회를 가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보편교회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로마가톨릭과 다른 것이 있다면, W·C·C의 경우에는 로마가톨릭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통합하는 범종교적 의미의 보편교회를 가시적으로 이루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 기본적인 노선은 로마가톨릭의 보편교회 추구의 방식과 철저히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회,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이 생각하는 보편교회의 구현과 교회일치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일치를 이루어 가시적으로까지 구현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다만 정통교리와 신앙의 일치 곧 신조 혹은 교리의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서 비로소 가시적으로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어느 교파에 한정될 수 없으며, 보편교회를 이루는 단초가 바로 신앙의 일치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인 교회만이 성립하게 된다는 의미가 ‘공교회’라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백성, 즉 택자(擇者)들은 장로교회나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침례교파, 감리교파, 심지어 로마가톨릭과 순복음교파에도 있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바로 그러한 택자들이 하나의 보편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인 보편교회가 가시적으로 구현되는 원리는 제도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의 일치 곧 교리의 일치에 따르므로, 일치된 보편신앙이자 정통신앙의 확립과 공유가 없는 교회는 로마가톨릭이건, 순복음교파이건, 침례교파이건, 감리교파이건, 심지어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보편교회에는 속하지 않은 거짓교회일 수도 있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항상 종말 가운데서야 비로소 그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지평을 가졌으며, 그런 점에서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보편교회를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바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있는 것이다.

이 원리가 사도신경 안에 담겨 있으며, 그 원리를 바르게 숙지하는 신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W·C·C의 일치운동 혹은 교단통합이라는 거짓 일치와 거짓 연합에 동조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관점에서, 현대의 기독교는 결코 연합과 일치를 이룰 만한 시기와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역량과 시기는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으며, 다만 그런 보편교회요 우주적인 교회를 우리가 고백하고 추구하는 것은 믿음과 신앙의 조망을 통해서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신학과 교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이 들여온 바알에게 모든 선지자들이 무릎을 꿇던 시대에 엘리야가 보지 못했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의 용사들이 분명하게 보이셨고(왕상 19:18), 마찬가지로 모든 기독교가 로마가톨릭교회로만 보였던 중세시대의 제국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인 보편교회를 이루도록 하셨다.

바로 그러한 조망 가운데서, 우리들은 지금도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며 사도신경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